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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특별기고> 일두와 하동 영계서원

오흥녕
2024.06.25·10분 읽기·조회 36

 

 

 

김윤수(성균관 부관장, 성균관유도회총본부 부회장, 일두기념사업회 이사장, 지리산문학관장)

 

 

 

필자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일두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제7회 일두선비문화제가 지난 6월8일 축제의 주인공으로 동방오현이자 문묘 18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이 주향된 세계유산 남계서원에서 열렸다.

 

비가 안 오는 맑은 날씨를 기대했으나 예보대로 진행 중에 부슬비가 내렸다. 진행측에선 불편하지만 가뭄에 해갈되는 비라서 오히려 축복의 단비니 뭐라 할 것인가. 타들어가는 민심을 걱정하는 일두의 마음을 반영한 하늘의 섭리를 믿고 따를 수밖에.

 

아침 9시에 일두탄신제를 지내고 개회식에서 개회사를 통해 함양의 3대 군립축제인 천령문화제, 함양산삼축제, 함양연암문화제에 일두선비문화제를 추가하여 4대 군립축제로 승격시켜 한국의 3대 선비문화축제인 남명선비문화축제, 영주한국선비문화축제, 일두선비문화축제로 육성시켜줄 것을 그 자리에 참석한 진병영 함양군수에게 건의하였다.

 

개회식에 이어 명성당 앞으로 자리를 옮겨 우중에도 불구하고 함양예총(회장 이진우)이 주관한 마당극 「남계의 노래」를 관람했는데 참석자들의 박수가 여러 번 터졌다. 다시 자리를 풍영루 앞의 메인무대로 옮겨 시상식이 개최되었다.

 

올해는 일두 선생이 안음현감으로 부임한 지 5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두는 현감으로 부임하고 객사 문루 선화루를 중창하여 광풍루로 개칭하고 광풍제월의 의미를 살려 제월당을 동천 언덕 위에 건립하였다. 광풍루제월당 5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현재 광풍루에 게시되어 있는 안음현감 장세남이 지은 칠언율시 주련에 차운하는 한시를 공모하였다. 광풍루와 제월당이 소재한 안의향교(전교 김경두, 200만원 지원), 일두기념사업회(200만원 지원), 지리산문학관(210만원 지원)이 공동개최한 전국한시지상백일장을 통하여 100여 편의 응모작을 받아 그중에서 33편을 뽑아 시상하였다.

 

장원 1명은 성균관장상(상금 100만원). 방안 2명은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상(상금 각 50만원), 탐화 10명은 안의향교 전교상(상금 각 25만원), 입선 20명은 일두기념사업회이사장상(8만원 상당의 인산죽염치약 각 10개씩)을 시상하였다.

 

이어서 축하공연과 도시락 점심이 펼쳐졌다. 식후에 정유지 경남정보대 디지털문예창작과 교수가 주관한 일두디카시공모전 시상식이 열렸고 한시수상작과 디카시 수상작, 학생문예전의 작품이 전시되어 참관자의 눈을 고급지게 하였다.

 

다음날 해마다 열리는 일두성지순례를 관내에서 벗어나 외지로 정해 일두의 관향 경남 하동군으로 대형버스 1대에 문중과 회원 37명이 타고 출발하였다.

 

남원구례고속도로로 달려가 먼저 악양정을 방문하고 우선 뒤편의 덕은사를 참배하였다. 문손인 정문상 함양향교 전교의 분향에 다같이 사배하였다.

 

악양정은 폐허로 있다가 산청 출신 선비 산석 김현옥(金顯玉, 1844~1910)이 여기에 우거하며 악양정 유지를 찾아내고 소학강회를 열며 악양정 중건의지를 다지다가 1891년(고종28)에 하동군수 강영길(姜永吉, 1849~1904)의 후원에 힘입어 1901년(고종38)에 중건하였다. 지방으로 신위를 써서 제향하는 구차함을 벗어나 1920년에 덕은사를 창건하였다. 소학의 저자 주자를 주벽으로 좌우 좌벽에 한훤당 김굉필, 탁영 김일손, 우벽에 일두 정여창, 돈재 정여해를 배향하였다.

 

악양정은 정자라기보다 강당의 역할에 맞는 건축구조이다. 덕은사란 사당도 갖추고 향사도 올린다. 사당과 강당을 갖춘 서원의 규모와 행세이다. 서원의 명칭과 편액이 없을 뿐이다. 일두를 향사하는 하동의 서원 영계서원은 훼철된 뒤 복원할 기미나 가망이 없다. 그렇다면 악양정과 덕은사를 영계서원으로 명명, 영계서원의 법통을 계승, 복원하여 서원으로 승격, 활용함이 합당하다고 제안한다.

 

악양정 방벽엔 국가 보물로 지정된 화개현구장도(복제품)가 게시되어 있었다. 본디 남계서원 소장본이 유출되어 유통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복제품이라도 정작 남계서원에는 게시되어 있지 않아 아쉽다.

 

쌍계사를 관람하기 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사하촌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팔영루, 진감선사비(수리중이라 관람불가), 마애여래좌상 등을 관람하였다. 팔영루는 광풍제월, 음풍농월처럼 쌍계팔영이 대칭어이다. 고운 최치원이 살던 곳이거나 등람한 곳이라고 한 곳이다. 진감선사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문사 고운이 명명했을 것이다.

 

고운의 자취를 지우고 진감선사의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서 「어산(魚山)」이란 불교 음악을 작곡한 데서 연유한다고 한 해설은 터무니없는 망문생의다. 어산이란 용어 및 범패는 중국 위나라 조조의 아들 조식이 어산에서 창시한 범패음악이다. 진감이 차를 가지고 오듯이 도입한 것이다. 고운이 중국 남북조 시대 문사 심약의 팔영루를 본따 명명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어 하동야생차박물관을 관람하고 체험관에서 음다례를 행하였다. 30분을 달려 구례로 넘어가 운조루를 관람하였다. 운조루는 같은 시조시인 유응규 교수가 태어나 자란 곳이어서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타인능해의 자선정신을 체감하고 시조 1수를 읊었다.

 

운조루 / 김윤숭

 

운이나 탐욕으로 이룬 부귀 아니네

 

조정엔 청렴이고 집안엔 근검이지

 

누대에 전승된 가훈 여기 서서 느끼네

 

일두는 화개현과 악양현을 애호하여 악양에 솔가, 이사하고 악양정을 짓고 은거강학하였다. 때로 배 타고 유람하고 시내에서 낚시도 하고 소를 타고 쌍계사와 청학동을 유람하였다. 불일폭포 일대를 조선시대 선비들은 고운 최치원이 신선으로 왕래하는 청학동으로 인식하였다. 남명 조식도 청학동을 여러 번 왕래하였다. 청학동에서 고운 최치원, 일두 정여창, 남명 조식이 정신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일두의 악양정은 본디 섬진강변 도탄(陶灘)으로 불리고 후학들은 도탄에서 일두를 회상하였고, 악양정이 있는 골짜기를 일두가 제자들과 회강한 곳이라 하여 회강동이라 하였다. 이후 유덕자가 은거한 곳이라 하여 덕은동이라 하였다. 도탄과 악양정은 몇백 미터 거리가 있지만 같은 곳으로 인식되어 일두를 회모, 음영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두가 우거한 악양현과 유람한 화개현 및 남명이 이거한 덕산현은 옛날 진주목사 관할이었으니 모두 진주사람이었다. 그러나 악양현과 화개현이 조선 후기 숙종 28년(1702)에 하동군에 편입됨으로써 지금은 하동으로 인식된다.

 

일두는 하동정씨이니 그 관향인 하동에 조선시대 선비들이 서원을 건립하여 제향하였다. 영계서원이다. 숙종 25년(1699)에 하동군 양보면 영계마을에 창건하고, 헌종 15년(1849)에 횡천면 횡보마을 내기로 이건하였다가 대원군이 훼철하여 빈터로만 남았다.

 

영계서원은 각종 기록과 사전에 학봉 김성일이 창건했다고 하나 엉터리없는 왜곡, 오류이다. 짐작컨대 하동에 사는 학봉 후예 집안에서 주도적으로 노력하여 일두의 관향 하동에 숙종 24~25년(1698~1699) 영계서원을 창건하고 학봉을 배향한 것이다. 

 

창건 초기 봉안문을 고촌 배정휘(裵正徽, 1645~1709)가 지었다. 고촌은 본디 성주 사람이나 외가는 함양의 풍천 노씨이다. 그 모친은 사암 노관의 증손녀로 조부는 사소, 부친은 노륜, 모친은 지족당 박명부의 딸이다. 고촌은 풍천노씨 노숙동, 노우명, 노사예 등을 향사하는 함양 도곡서원의 창건(1701, 숙종27) 상량문을 짓기도 하였다.

 

 

진주 선비 서계 박태무(朴泰茂, 1677~1756)는 영계서원 강당의 중수고유문을 지었고, 헌종 15년(1849)에 서원을 이건한 뒤 상량문은 하동 선비 초정 박용한(朴龍翰, 1790~?)이 지었다.

 

하동에는 또 하동읍 남쪽에 목도마을이 있는데 옛날은 섬이었다. 여기에 일두선생이 강정(江亭)을 짓고 소요하였다. 여기는 바다가 더 가까운 곳이니 남명의 산해정처럼 바다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일두의 대표시로 지리산제일시 <화개음>을 읊조린다. 화개음은 <악양>으로 문헌공실기와 일두집에 실려 있는데 화개현에서 읊은 것이니 <화개음>이 타당하다.

 

화개음 / 정여창

 

風蒲泛泛弄輕柔 갯버들은 흔들흔들 가벼이 부드럽고

 

四月花開麥已秋 사월 화개 땅엔 보리가 다 익었네

 

看盡頭流千萬疊 두류산 천만 봉을 두루 다 돌아보고

 

孤舟又下大江流 조각배는 또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네

 

<일두유집 제1권 / 시(詩)>

 

외로운 배를 타고 큰강을 흘러 내려가 남해 바다에 이르렀다. 강과 바다, 여기에서 일두와 남명을 연상한다. 둘 다 지리산과 가야산 산골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섬진강가의 악양정과 김해 바닷가의 산해정 지역으로 이사하여 우거하였다. 산과 바다를 겸하여 관상할 수 있는 지역을 택하여 살았다. 둘 다 지리산의 남쪽과 동쪽을 택하여 악양현과 덕산현에 이주하여 진주인이 되었다. 둘 다 청학동을 사랑하여 자주 왕래하였다

 

남명은 악양정터 앞 도탄을 지나며 천령의 유종이라고 일두를 회고하고서 그 불행을 탄식하였고, 남계서원에 1박하고 사당에 참배하며 “동국 현인 중에 이 선생만이 거의 흠이 없다(東國諸賢中。惟此先生。庶幾無疵累矣)”라고 일두를 예찬하였다.

 

남명은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정수역에 있는 지족당 조지서의 부인 열녀정려비를 보며 조지서를 회상하고, 악양면의 삽암(취적대,모한대)의 주인공 고려 한유한, 도탄(악양정)의 주인공 일두 정여창, 정수역의 주인공 지족당 조지서를 삼군자로 칭하며 존경의 뜻을 표하였다. 남명 조식을 더하면 두류사군자로 칭할 만하다.

 

어쩌면 남명은 일두를 흠모하며 그 행적을 따라한 느낌조차 들 정도이다. 일두는 문묘종사되고 남명은 좌절된 것이 아쉬울 뿐이다.

 

다시 구례남원고속도로로 들어서 귀향하다가 이사장으로서 동참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자 남원의 명물 추어탕으로 저녁 대접하고 싶다고 물으니 모두 찬성하였다. 남원 시내에 들러 다들 맛있게 회식하고 함양에 귀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