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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특별기고> 북학파와 북벌론 녹봉서원

오흥녕
2024.07.18·15분 읽기·조회 76

 

 

 

김윤수(성균관부관장, 성균관유도회 부회장, 일두기념사업회 이사장, 지리산문학관장)

 


 

조선시대 학맥은 스승의 선택과 선택의 여지없는 전승으로 이어졌다. 충청도 노론과 소론 시대 경상도와 전라도는 변방이었으므로 중앙은 충청도, 나머지는 지방이었다. 경북의 퇴계학맥도 마찬가지로 경북이 중앙 스승이고, 나머지는 지방 스승이다. 함양에서도 지방 스승에게 배우고, 충청도로 경북으로 중앙 스승을 찾아 유학하여 학맥을 계승하였다.

 

황고(黃臯) 신수이(愼守彝, 1688-1768)가 지방 스승 유탄도에게 배우고, 50세의 늦은 나이로 중앙 스승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1746, 문헌공실기 개편중간)에게 집지한 것은 학맥의 계승이었다. 녹봉 유언일도 황고의 수제자이면서도 굳이 중앙 스승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 1705-1768, 월성초당 중건)에게 배운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하겠다.

 

녹봉(鹿峯) 유언일(劉彥一, 1725-1797)은 함양 심진동 출신의 대학자이다. 함양군 안의면 하비에 녹봉서당을 세우고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진사, 문과, 교서관 정자 유덕개(劉德蓋, 1537-?)의 5세손이고, 난곡(蘭谷) 우석일(禹錫一, 1612-1666)의 손서이다. 우석일의 셋째 아들이 자연당(自然堂) 우공(禹灨, 1660-?)이고 우공의 사위가 유언일이다. 우공의 아들 사유헌(四有軒) 우홍점(禹洪漸, 1686-1763)과 처남매부지간이 유언일이다. 우홍점의 아들이며 유언일의 처조카가 신천(新泉) 우사흠(禹師欽, 1702-?)인데 나이차가 무려 23세나 연상이다.

 

유언일의 아들은 유호(劉瑚,1749,영조25~?)와 유련(劉璉)이고 유련은 뒤에 유언인(劉彥仁)에게 양자갔다. 사위는 평촌(坪村) 박지순(朴之淳,1749~1810)인데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1571~1639)의 6세손이다.

 

황고는 성팽년의 후손, 녹봉 제자 성여채 등이 녹봉을 위하여 서당을 지어주자 기문을 지어주며 격려하였다. 녹봉서당은 안의삼동 유람객들의 숙소로도 활용되었다. 1795년(정조19) 9월 당시 남원 땅 현재 장수군 선비 명은(明隱) 김수민(金壽民 1734-1811, 자 제옹(濟翁), 본관 부안)이 안의삼동을 유람하였다.

 

김수민의 여정을 더 살펴보면 우정전가(禹廷全家)에서 삼박, 당시 현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1792~1796 재임)이 지은 연상각(煙湘閣),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등을 보고 풍자시를 짓고 안의향교를 지나 지대촌(止垈邨, 안의현 지대면(知代面), 안의면 신안리)에서 4박, 23일에 녹봉서당(鹿峯書堂, 안의면 하원리 하비마을)으로 녹봉(鹿峯) 유언일(劉彦一 1725-1797, 황고 신수이 문인)을 방문하고, 심진동에 들어가 장수사(長水寺)에서 5박, 24일에 용추폭포(龍湫瀑布)를 보고 용추암(龍湫庵)에서 서산(西山)·송운(松雲)·무학(無學)·문곡(文谷)의 영정을 친견하고, 도솔암(兜率庵)에 올랐다가 녹봉서당에서 6박, 25일에 위천면 상천리(上川里)에서 7박, 26일에 면우곡(眠牛谷, 위천면 강천리 면동)에서 8박, 27일에 수승대(搜勝臺)를 거쳐 갈천동(葛川洞)에서 9박, 28일에 남령(藍嶺)을 넘어 영각사(靈覺寺)에서 10박, 29일에 화엄판전(華嚴板殿)을 보고 육십령(六十嶺)을 넘어 귀가하였다.

 

김수민이 10년 연하사로서 사칠이기론에 대해 녹봉에게 질의하며, 퇴계와 율곡이 각기 입론이 있는데 어느 것을 따르냐고 물으니 녹봉은 기호학파답게 율곡의 논의를 위주하라고 답하였다.

 

녹봉의 일관된 사상은 북벌사상이다. 북학파 실학자 수령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과 교유하였지만 우암학파 답게 10세에서 73세까지 초지일관 북벌을 주장한 것은 실학만능의 시대에 이채로운 일이다. 북벌론을 반청숭명(反淸崇明)이라는 전통적 화이관, 주자학적 의리관, 명분론에 입각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그와 대립되는 사상을 북학파라고 호평해온 것이 사실이다.

 

북학파의 종장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재임하였고, 그보다 앞서 북학파의 학자 아정 이덕무가 사근도찰방에 재임하여 함양 지역이 북학파의 경륜 실천 무대였다. 그때 토박이로서 북벌론의 기치를 높이 든 학자가 있었으니 심진동의 대학자 녹봉 유언일이었다. 청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든 시기에 북학이 아닌 북벌을 추진하여 100년을 준비했다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보다 먼저 청나라를 점령했을 것이다.

 

 

북벌의 역사(압록강·두만강 돌파)

 

묘청의 북벌론(1135)

 

공민왕의 북벌(1370, 요동성 점령)

 

최영의 북벌(1388, 위화도회군)

 

정도전의 북벌(1398, 피살 종료)

 

효종의 북벌(1659, 서거 종료)

 

유언일의 북벌론(1796)

 

맥아더의 북벌론(1951)

 

황고는 녹봉에게 마음 심을 강조한 심자통운의 절구<贈劉子精 彥一○二首>를 지어주며 격려하였다. 녹봉도 차운시 <次黃皐愼先生韵二首>를 지어 화답하였다. 황고는 황석산성 유적인 황암사의 주관인 이성혁의 요청으로 사당의 중수기 <황암사우중수기>를 짓고 상량문 <황암사우중수상량문>과 춘추 향제 개축문(改祝文) <황암사우춘추향개축문>을 지었다. 황암서원에는 수령이 아닌 순국자를 위하여 별묘를 세워 제향하였다. 그 별묘를 중수할 때 기적문(記蹟文) <황암별묘중수상량시기적문>과 개축문 <황암별묘춘추향개축문>을 짓기도 하였다. 황고의 제자 녹봉은 강당의 중수 상량문 <황암서원강당중수상량문>을 지었다.

 

역천이 지리산 유람할 때 쫓아간 녹봉에게 불교문자를 섞어 장난삼아 지어준 시 <劉子精 彦一 追至智異山後 爲誦其送友詩求和 戲作禪語以答之>가 남아있다.

 

녹봉은 당시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과 동시대에 살았다. 어진 사람과 문헌을 찾아다닌 연암의 특성으로 보아 녹봉을 방문하고 예를 표했을 것으로 보이나 아직 관련 사항은 미상이다.

 

연암이 현감으로 부임하고 용추폭포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노학자 유처일(劉處一)이 축관으로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가 입은 학창의를 연암이 입고 있다가 되놈 옷 입었다고 누명을 쓴 일이 있었다. 언(彦)과 처(處)는 글자가 유사하니 유언일의 오자일 가능성이 높으나 증명할 문헌이 없다.

 

<녹봉선생유사실록>에서 용추폭포 기우제에 참석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녹봉이 안의현감 조광규와 박지원에게 원로 대우를 받고 숨김없이 충고를 해주어 유모같은 선비를 본 적이 없다고 감탄할 정도였으니 유처일은 오자고 유언일이라고 봄이 합당하다. 연암이 존숭한 원로 학자가 유언일이고 그 옷 학창의를 본 따 지어 입었다가 비난을 듣게 만든 사건의 배경 인물이다. 은밀히 비난한 사람은 박지원이 절교를 선언한 함양군수 윤광석이었다고 한다.

 

녹봉서당은 한때 녹봉서원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녹봉 생전에 지은 녹봉서당에 사후 제자들이 사당을 지어 추모했으니 서원의 규모는 갖춘 것이다. 1843년(헌종9) 감모재(感慕齋)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녹봉서원(鹿峯書院) 상량문을 지었다. 노광두는 함양 출신으로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아우의 후손으로, 황고 손자 황강(黃岡) 신성진(愼性眞, 1752-?)의 문인이며, 이계(尼溪) 박내오(朴來吾, 1713-1785)의 외손이다. 문과 급제하고 호조 참판까지 지냈다.

 

산청 선비 병와(病窩) 송심명(宋心明, 1788-1850)이 1847년(헌종 13) 4월 함양의 정동응(鄭東膺) 및 안의 성북의 박정기(朴禎箕) 등과 함께 산천 유람을 떠났다. 수망령(水望嶺)을 넘어 함양의 은신암(隱身庵), 장수사(長水寺), 용추폭포, 풍류암(風流巖), 녹봉서원(鹿峯書院), 월연암(月淵巖), 대고대(大高臺)를 거쳐 산청을 지나 귀가하였다. 송심명은 남명의 연원으로 존양재(存養齋) 송정렴(宋挺濂)의 6대손이며, 삼가의 유전(柳田)에서 정조 12년에 태어나 철종 1년에 별세하였다. 감모재 노광두와 이종(姨從)으로 친하였다. 성리학과 서법에 뛰어나고 산수 유람을 좋아하였다.

 

진주목 종화리 현 하동군 옥종면 종화리 출신 선비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 1809-1877)이 안의삼동을 유람하고 심진동기를 지었는데 심진 기행 때 심진동 첫 방문지가 녹봉서원이었다. 심원정, 용추폭포, 은신암을 탐방하였고, 수승대의 갈천 임훈, 모리의 동계 정온, 월성의 동춘당 송준길의 역사유적이 유명한데 용추폭포는 명현이 없어 지역이 불우하다고 탄식하였다. 남계서원 초대 별유사(1847~1849)는 정동휴(鄭東休)인데 하달홍과 같이 전국 유람을 다녔다.

 

명현이 없는 게 아니라 홍보가 덜 되어 알려지지 않은 것이니 용추폭포 지역의 불찰이다. 안음현감 동방오현 일두 정여창이 폭포 위에 물고기를 방류하여 일두어라 불리고 번식이 잘되어 장수사 유학생 옥계 노진이 다 잡아먹을 뻔하였다고 뒷날 장수사를 유람하며 회고하였다. 연암 박지원도 안의현감으로서 용추폭포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니 어찌 명현이 없다고 할 것인가. 잘 몰랐을 뿐이건만.

 

지금 그 터엔 축사 폐수에 찌든, 순조 19년(1819)에 세운 녹봉서당비만 서 있는데 녹봉 아들 유호의 청탁, 녹봉 문인 신성항(황고의 손자)의 글, 유방의 전액, 우하성의 글씨로 남아 있다. 북벌론의 큰 기상과 기개가 서려 있던 녹봉서원이 빈터조차 지키지 못하고 축산폐수에 황폐화된 채로 방치되고 있으니 북벌의 의지조차 황폐화된 것 같아 씁쓸하다.

 

녹봉의 문집과 자료들이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 초고 상태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다.

 

한 집안이나 한 고을의 문풍, 학풍, 사풍은 당사자의 문집을 간행하여 보급하고 서원을 세워 향사하는 것으로 대표성을 갖는다. 일두 정여창 선생의 <문헌공실기>가 <일두문집>으로 간행된 것은 크게 유의미한 일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원문정보 제공하는 한국문집총간에 <일두문집>이 수록되어 보급됨으로써 일두 연구에 큰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두 주향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계서원에는 선비가 세운 최초의 서원에 조선 인물 최초로 향사되는 광영이 빛난다. 안의 선비들이 선정과 학덕을 기려 세운 용문서원은 갈천 임훈이 짓고 세운 문헌공정선생사당비만이 외로이 서 있는데, 서원을 복원하여 안의 유교문화의 전통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갈천이 남계서원을 위해 지은 한국 최초의 서원 권선문도 선양할 필요가 있다.

 

안의삼동의 유교학자 9현, 곧 안의구현을 손꼽았는데 원학동에서 갈천 임훈, 첨모당 임운, 석곡 성팽년, 동계 정온, 황고 신수이 등이고 심진동에서 녹봉 유언일, 화림동에서 지족당 박명부, 속천 우여무, 난곡 우석일 등이다. 안의 지역의 대표서원 용문서원에는 일두 주향에 갈천 임훈, 첨모당 임운, 동계 정온이 배향되었고, 용문서원장을 지낸 지족당 박명부나 유공한 속천 우여무는 배향이 추진되지 않았다.

 

동계는 일두 사대 사액서원인 함양의 남계서원, 안음의 용문서원, 거창의 도산서원, 종성의 종산서원에 모두 배향되었다. 명망이 높은 인물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가까운 고을 합천의 이연서원에 배향되지 않은 것은 석연치 않다.

 

일두 삼전제자 석곡 성팽년과 요수 신권이 병향된 구연서원에는 황고 신수이가 배향되었고, 난곡 우석일은 배향이 추진되다가 무산되었는데 지금이라도 재추진하여 성사시킬 필요가 있다. 일두 삼전제자 대소헌 조종도가 존재 곽준과 병향된 황암서원에는 진주성에서 순국한 의병장도 배향되어 있으니 황석산성에서 순국한 일두 손자 정언남과 효자로 순절한 일두 증손 정대민을 황암사에 배향할 필요가 있다. 황암사에 강당과 동서재를 건립하여 황암서원으로 복원할 일이 유교 서원 부흥을 위하여 필요하다.

 

안의지역의 서세동점 서인·노론의 서원 성천서원은 한때 안의에 은거하였던 동춘당 송준길이 주향이고 경상도관찰사 이숙이 배향이다. 1811년 동춘당 후손 역천 송명흠을 추배하였다. 도암 이재와 황고 신수이도 배향이 추진되다가 서원금령에 걸려 무산되었다. 성천서원이 안의면 향교 옆 옛터에 복원된다면 황고와 역천의 문인, 성천서원에서 강론한 녹봉 유언일도 배향될 자격이 충분하다.

 

일두 정여창-신고당 노우명-옥계 노진-석곡 성팽년-동계 정온 및 지족당 박명부, 옥계 노진-대소헌 조종도로 학맥이 이어졌다. 일두 사전제자 지족당 박명부는 일두 재전제자 옥계 노진의 신계서원(사액 당주서원)을 중건하고 필요한 사항을 해결한 공신이고 녹봉 유언일은 황암서원에 공헌하였으니 배향될 요건은 갖춘 셈이다.

 

갈천은 일두를 위하여 한국 최초의 서원권선문을 지었고 문헌공사당 비문을 짓는 등 일두를 존모하고 행동했으니 일두의 사숙제자라고 할 만하다. 일두의 사숙제자 갈천의 제자에 석곡이 있고 석곡의 제자에 동계와 지족당이 있다. 그 동계의 제자에 부자지간인 속천과 난곡이 있다. 영·정조 때 황고와 그 제자 녹봉이 있어 안의학풍을 이끌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된 문집은 연구에 편리하다. 본고의 9현에서 임훈의 갈천집, 임운의 첨모당집, 정온의 동계집, 신수이의 황고집만 문집총간에 수록되었고, 성팽년의 석곡집, 박명부의 지족당집, 우여무의 속천집, 우석일의 난곡유고, 유언일의 녹봉집은 제외되었는데 수록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심진동의 대학자 녹봉 유언일의 문집 자료가 규장각에 필사본 초고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것도 영인, 번역의 보급, 연구 활성화가 시급하다. 녹봉서원 상량문을 지은 함양 선비 노광두의 <감모재집>이나 그 족제 노광리의 <물재집>, 화림동의 대학자 전병순의 <부계집> 등등 함양 선비들의 문집이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문집총간에 소외된 것이 많이 있는데 다수 수록되어 연구에 편리하게 이바지되도록 함양군 차원에서 수록 촉구에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학자원 출판사에서 녹봉선생전집으로 영인본 출판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며, 이 책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유언일의 녹봉선생문집, 녹봉선생유사실록(녹봉서재기는 유사실록 상·하권의 하권에 해당한다)을 모아 전집으로 출판하는 것으로 안의학 내지 함양학, 함양노론학맥, 황고녹봉학의 연구에 기여함이 있길 바란다.

 

내년 2025년은 녹봉이 탄생한 지 3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탄신 30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사업으로 이번 녹봉집 영인을 추진한 것이다. 이 책을 바탕으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심진동의 대학자, 안의의 참 선비 녹봉 유언일의 진가와 북벌사상이 발휘되기를 소망한다. 북벌사상은 지금은 간도회복 및 고구려, 발해 영토수복의 다물정신으로 등치, 계승하여 성공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