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오정 김방한 선생과 강유후 기장현감 상고(詳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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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후 현감의 비석이 있는 3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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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 김방한 공을 모신 이현사의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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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후 현감의 비석이 기장향교 향안비 옆 홍살문 당간 지주석과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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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국장이 옮겨 둔 강유후 현감의 비석을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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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읍 화전마을에 있는 강유후 현감의 비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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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읍성 동문지 비석군에 있는 강유후 현감의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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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 선생이 관리해 온 비석을 성인수, 노경구, 유평규 씨가 옮길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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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을 옮긴 후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강유후 현감의 위패가 모셔진 기장군 일광면 원리의 효이재(孝伊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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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 김방한 공의 교지(左)와 호패(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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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성균관 전인, 성균관 윤리위원, 기장향교 사무국장
지난 8월27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읍 화전마을을 방문해 말로만 전해 듣고 있던 ‘조선시대 강유후(姜裕後, 1606~1666) 기장현감이 1654년(효종5) 기장 동문지에 세운 비석’을 직접 확인했다.
선시(先時=前日)에 화전마을에 사는 정진실 유림(기장향교 원임 총무수석장의, 원임감사)을 통해 ‘강유후 현감의 비석이 집안에 보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리의 필요성을 의논한 결과 ‘기장교궁 향안비 가까이 기장향교 홍살문 당간 지주석이 있는 자리로 옮겨 관리하는 게 맞겠다’고 논의되어 이날 옮기게 되었다.
강유후 현감은 기장향교 병술년(1646, 인조 24) 향안에 올라와 있는 월성(경주)김씨 동한, 지한, 종한, 방한 4형제분 중 막내 동생 오정(鰲亭) 김방한(金邦翰) 선생과 인연이 있는 분이다.
1635년생인 오정 선생은 11세에 기장문묘에 입교해 8년 후인 19세에 기장 장안에 소재한 신라시대 고찰 장안사 대웅전의 기(記)를 써서 후일 국가지정보물 1771호(국가문화유산)가 되게 한 분으로, 울산 구강서원과 양산 웅상 등지(等地)에서 그 휘(諱)를 찾아볼 수가 있는 분이다.
기장고을의 유림제 향사문중(해주오씨 구산단, 김해김씨 의열사, 동래정씨 사정단, 우봉김씨 백산단, 은진송씨 향모사, 경주김씨 이현사, 영월신씨 다산단)과 수계문중(남평문씨 문연정, 영천이씨 상충계, 광산김씨 모원정 경원계) 등에 입계한 유림들은 익히 잘 알고 있는 분으로서 영남의 대유학자라 해도 부족함이 없으며, 문장도 위대한 업적으로 남겨져 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감히 아무나 근접할 수 없는 오정 선생의 대표적인 문장으로는 걸하미면환속소(乞下未面還屬訴)가 있다.
이렇듯 영남 기장의 대문호(代文豪) 오정 선생과 같은 시기에 기장고을을 지킨 강유후 현감의 비석을 마주 대함에 400년의 시간을 돌려 놓은 듯 눈시울이 붉어짐과 온몸에 소름이 돋음은 소생(小生)뿐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아울러 각종 자료와 해박한 지식으로 강단에 서서 거인의 사자후(獅子吼)로 역설하며 향토사 연구에 매진하는, 기장 향토사학자이자 박학한 견식(見識)으로 부산의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넘나드는 황구 선생께 자문을 구하고 지식을 빌어 벅찬 감동으로 맞이한 강유후 현감을 상고(詳考)하고자 한다.
강유후 현감은 진주강씨 박사공(博士公)파 16세손으로, 상대(上代)는 박사공 계용(啓庸, 1220)으로 조선조 세종대왕 때의 문신인 사숙재 강희맹(1424~1483)이 7대조가 되는 대대로 걸출한 선비 집안이었다.
『진주강씨대동보』에는 ‘강유후는 자가 여수(汝垂)이며, 호는 옥계(玉溪)로 인조 기축년(1649)에 별시에 올랐다. 벼슬은 가선대부황해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해주목사를 역임했다. 묘는 옥계선영이며, 문집에는 성균관과 지방향교에 배향되어 있는 동국 18현 중 한 분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찬한 신도비명도 있다. 행장은 숙종 갑술의 재상 박세채 선생과 이세화, 홍계적 선생이이 여러 번 청을 하여 청백리에 선정되어 자손 대대로 기록되는 명을 받았다. 부인은 두 분으로 정부인 함양박씨와 정부인 강릉김씨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강유후 현감의 아들과 딸은 모두 11남 1녀가 출생해 그 중 기장으로 세거한 이가 있는데, 바로 현감의 손자로 현감의 네째 자제인 석삼(錫三, 1650~1703)의 두 번째 아들 용부(容溥, 1666~1725)로 기록되어 있다.
즉 용부가 지금의 기장군 장안읍 효암리(車岩)로 이주를 하였던 것인데, 고향에서 어떤 사연으로 거처를 옮겼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용부는 아들 주태(柱泰, 1684~1746)를 두었고, 주태는 아들 네 형제를 두었는데, 셋째 아들 경환(瓊煥)에서 손자인 재헌(在憲)과 재관(在寬, 1808~1882) 두 형제로 이어지는 계보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장안읍 효암리 거주세대와 일광면 거주세대로 구분이 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 청백리 강유후 현감의 기장 거주 후손은 앞에서 살펴본 바로 장안읍 효암마을과 일광면 일대에서 주거를 했으나 효암마을이 신고리원전의 부지편입으로 인하여 부득이하게 이주를 해 일부 세대는 장안읍 임랑리 및 그 밖의 지역으로도 옮기게 되었으며, 일광읍 일대 주거세대는 아직도 정착을 하고 있다.
기장지역에는 강유후 현감과 관련하여 3곳에 공덕선정비가 있는데 하나는 철마면 임기리에 기장향교 원임장의인 정상덕 유림의 집 대문과 마주하고 있으며, 천년고찰의 하나인 선여사지(船餘寺地) 부도탑(浮圖塔)과 나란히 서 있다.
철마면 임기리의 비는 1881년 7월에 세웠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행히 이곳으로 오시어 폐막을 없애고 땅의 경계를 모아 주시니 이 비석에 새기어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남기신 그 사랑을 영원히 사모하며 노래하리라”라고 고을 현민들이 그의 선정(善政)을 칭송했다.
또 다른 하나는 초대, 2대 기장문화원장을 역임한 고 김진옥(원임 성균관 전학·전의, 기장향교 원임장의) 어른께서 원장 재임시에 기장읍성 동문지에 모은 공덕비군에 있다. 그리고 동문지에 있는 비석은 1654년에 세웠으나 새겨진 글은 세월이 오래되며 마모가 심해 내용 확인이 불가능하다.
산자수려(山紫水麗)한 기장고을에 산재해 있는 오랜 역사 이야기가 귓전에 맴돌며 머물고 있는 즈음에 영국의 처칠 수상의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한 명언이 새삼 떠오르는 건 무슨 연유일까?
오정 김방한 선생과 강유후 현감의 기장고을에 머무심을 자랑한다.
이 비석과의 조우(遭遇)를 연결해 준 운강(雲岡) 선생의 용기와 배려에 고마운 인사를 드리고, 그동안 많은 땀 흘리며 모아 둔 자료를 기꺼이 제공해 준 한림당(翰林堂) 선생께 돈수백배(頓首百拜)로 겸연쩍은 마음을 대신한다.
그리고 운강 선생과 왕금자 기장향교 여성수석장의(기장향교 여성유도회 회장)와의 사전현장 답사, 이날 함께 비석 운반에 아낌없는 수고를 다해준 성인수 기장향교 의전수석장의(성균관 전학, 기장향교 청년유도회 회장), 노경구 기장향교 연락수석장의(원임 기장군행정자치국장, 원임 기장읍장), 유평규 대변마을 이장(기장멸치축제사무국장, 기장읍주민자치위원회 간사)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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