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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특별기고> 남명 조식의 지리산과 신어산

오흥녕
2024.11.25·10분 읽기·조회 105

 

김윤숭 성균관 부관장, 성균관유도회총본부 부회장, 일두기념사업회장, 지리산문학관장

 


 

1. 월봉서원의 월봉고전아카데미

 

조선왕조는 유교 성리학의 나라이다. 조선조 유교 성리학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성리학 명제인 사단칠정의 이기 문제, 곧 사단칠정 논쟁을 주도한 퇴계 이황과 제자 고봉 기대승이 있는데 고봉을 향사하는 서원이 광주의 유명한 월봉서원이다.

 

반면에 김해의 월봉서원은 40여 년밖에 안 된 현대서원인데 그래도 유명한 서원이 되었다. 조선 말기를 휘황하게 장식한 대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제자인 월헌(月軒) 이보림(李普林, 1903~1972)이 1917년에 월봉서당(月峯書堂)을 건립하여 강학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월헌 사후 1984년에 유림의 공의(公議)로 서당 오른편에 명휘사(明輝祠)를 건립하여 위패를 모셨다. 이때부터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을 갖춘 월봉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월헌의 아들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 1931~2007)도 가학을 계승하여 학자를 양성하였다. 화재의 4남 이준규 교수(부산대 한문학과)도 그 학문 전통을 잇고 월봉서원을 지키며 월봉고전아카데미를 이끌고 있다. 이 글은 아카데미에서 강연한 초고인데 신산서원 이야기는 고증문제라 생략하였다.

 

화재의 스승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 1899~1988)도 간재의 제자이니 부친과 스승이 모두 간재학맥이다. 추연을 향사하는 합천의 태동서원은 2012년에 성립되었다.

 

올해 초인 2024년 5월에 김제 학성서원 개원식에 참석하고 왔다. 화석(和石) 김수연(金洙連, 1926~2019)이 1954년 세운 서당인 학성강당을 서원으로 확대, 개편한 것이다. 화석은 서암(瑞巖) 김희진(金熙鎭, 1918~1999)의 제자이고, 서암은 간재의 제자인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 1891~1974)의 제자이다.

 

남인 성리학 대산맥 한주학파의 종장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제자인 중재(重齋) 김황(金榥, 1896~1978)을 향사하는 산청 도양서원(道陽書院, 2001년 건립)을 포함하면 현대서원은 네 곳이 있다. 그 3곳은 간재학파의 현대서원이다.

 

1984 김해 월봉서원 월헌 이보림

 

2001 산청 도양서원 중재 김황

 

2012 합천 태동서원 추연 권용현

 

2024 김제 학성서원 화석 김수연

 

필자가 사는 경남 함양에도 간재학파가 있는데 유림면 유평리에 주자영당이 있고 거기에 향사되는 여암(厲菴) 정도현(鄭道鉉, 1895~1977)이다. 여암은 간재의 막내 제자 월헌 이보림보다 한두 해 앞서 계화도에 찾아가 제자가 되어 함양에서 간재학을 전승하였다. 필자도 어릴 때 부친 손을 잡고 경양재에 가서 뵌 적이 있다.

 

여암은 월헌과 함께 의령 의산서원(간재전우향사) 일을 주관하였고 월헌이 졸하자 만사를 지어 오도가 적막하니 외로운 신세 누구와 논의할꼬라고 애도하였다.

 

2. 남명 조식의 지리산과 산천재

 

조선 유교 성리학의 영남학파의 양대산맥 퇴계와 남명에서 남명 조식은 합천 삼가에서 태어나고 30세에 처가인 김해 신어산 아래 탄동으로 이사하여 산해정을 짓고 강학하였다. 45세에 모친상의 시묘를 계기로 다시 삼가로 이사하여 뇌룡사를 짓고 강학하였다. 61세에 지리산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강학하였다. 남명은 청년 시절에 바다를 바라보며 구만리 장천 대붕의 웅지를 품었으니 산해정이 그 상징이고 노년 시절에 하늘을 바라보며 성희천(聖希天)의 달관을 득하였으니 산천재가 그 상징이다.

 

두류산 양단수를 - 조식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듯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겻셰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듸뇨 나는 옌가 하노라

 

지금의 산천재가 자리한 곳에 가보면 덕천강이 흐르고 바로 윗물은 대원사 계곡에서 흐르는 물과 중산리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합류하는 두 갈래 물, 양단수임을 볼 수 있다. 무릉도원 같은 이곳에 터를 잡아 강학한 것이다. 왜 이곳에 터를 잡았을까? 무릉도원 같은 정취에 취한 것만이 아니다. 하늘 나라 바로 아래 천왕봉이 잘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 - 조식 

 

春山底處无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메 어디엔들 향기로운 풀이 없으리오마는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하느님 나라 가까운 천왕봉을 사랑해서라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빈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 것인가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은하수 같은 물 십 리에 마시고도 남음이라

 

삼가에 있는 선산과 재산은 아우에게 물려주고 지리산 덕산에 빈손으로 와서 개간하여 먹고 살았으니 빈곤을 면치 못해도 선비의 긍지와 지조는 잃지 않았다.

 

3. 일두의 악양정과 남명의 산해정

 

동방오현 일두 정여창은 39세 때 지리산 북쪽 함양 개평에서 지리산 남쪽 바다가 가까운 섬진강 강 언덕 진주 악양, 지금의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이사하여 악양정을 짓고 강학하였다. 남명도 30세에 지리산 동쪽 삼가현에서 바다가 가까운 낙동강 강 언덕,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산해정을 짓고 강학하였다. 모방한 것인가, 우연의 일치인가.

 

남명은 여행에도 철학이 있었다. 그것이 사간(四看) 사상이다. 간산간수, 산과 물을 보는 것이고, 간인간세, 사람과 세상을 보는 것이다.

 

두류십파황우협(頭流十破黃牛脇)

 

남명은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황소 가죽으로 만든 가죽 등산화가 열 번이나 뚫어질 정도로 지리산 답사를 많이 다녔다. 그렇게 유람하면서 산수를 즐기기도 했지만 역사적 인물과 세상 동태도 살펴본 것이다. 그 역사적 인물에 두류삼군자를 손꼽았다. 고려말의 은사 한유한과 일두 정여창, 지족당 조지서이다.

 

한유한은 덕산 사륜동에 은거했는데 고려 조정에서 알고 대비원 녹사로 부르는 조서가 내리니 도망하여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은거했다. 그가 낚시하던 곳이 섬진강 가 삽암(鍤巖)이다. 후인들이 모한대(慕韓臺)라고 새겼다.

 

조지서는 일두보다 4세 아래지만 같은 연산군의 스승, 세자시강원 관원이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엄격하게 교육하다가 가망이 없음을 알고 진주에 은퇴하였다. 미움 산 후과로 갑자사화에 희생되었다. 그 부인은 포은 정몽주의 현손녀로서 조지서가 희생된 후 정절을 지키고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에 있는 조지서 묘소에서 부군 곁을 수호하였다. 그 아랫마을에 정려가 세워졌다.

 

하동에 은거한 두류삼군자는 모두 은자의 삶을 산 역사적 인물들로서 남명의 가치관과 맞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을 높이 평가하고 닮고자 하여 같은 삶을 산 것이다.

 

남명은 63세 때 남계서원을 방문하여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알묘하고 문인에게 동국의 여러 현인 중에 이 선생만이 거의 흠이 없다고 고평하였을 정도로 일두를 흠모하였다.

 

4. 남명 조식의 신어산과 산해정

 

남명은 덕산에 살면서도 부인이 있는 김해 산해정을 별장처럼 사용하여 가끔 방문하기도 했다. 66세 가을에 산해정에 있을 때 수제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31세 시절 찾아와 반달을 머물렀다. 북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남명이 <대학팔조가>를 짓고, 또 한시 칠언절구 1수를 짓고 손수 써주며 보냈다.

 

在山海亭。書大學八條歌後。贈鄭君仁弘。- 산해정에서 <대학팔조가> 뒤에 써서 정군 인홍에게 주다 -

 

丙寅秋。先生在山海亭。仁弘往侍。留半箇月。仁弘北還。先生手書格致誠正歌。又書此一絶於其後以與之。

 

一生憂樂兩煩寃(일생우락양번원) 한 평생 근심과 즐거움에 번민스럽지

 

賴有前賢爲竪幡(뇌유전현위수번) 예전 현인 있음에 힘입어 깃발 세우네

 

慙却著書無學術(참각저서무학술) 책을 지음에 학술이 없는 게 부끄우니

 

強將襟抱寓長言(강장흉포우장언) 억지로 회포를 풀어 시조에 부치네.

 

영남학파의 양대종사 퇴계는 <도산십이곡>의 연시조를 창작하고, 한국 성리학의 양대산맥 율곡 이이는 <고산구곡가>의 연시조를 창작하였다. 퇴계와 쌍벽인 남명 조식도 <대학팔조가>(약칭 격치성정가)의 연시조를 창작하였다. 내암이 잘 간수하여 남명집 편찬할 때 수록하였으면 국문학사상 빛나는 고전이 되었을 터인데 안타깝다.

 

성재 허전의 제자 김해 학자 만취 노수용(1833~1902)은 성균관박사 조영환 등과 함께 고종 27년(1890) 신산서원 터에 산해정을 중수한 뒤 월초마다 강학하며 학생들에게 남명의 <대학팔조가>를 암송하게 해 흥기시켰으니 그 무렵까진 김해 지역에 전승된 것이다.

 

<대학팔조가>, 일명 <격치성정가>는 사서의 하나인 대학의 삼강령, 팔조목에서 팔조목을 시조로 읊은 것이다. 8수가 될 것이고 서시가 관행처럼 덧붙는 전통으로 보건대 9수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서시, 격물가, 치지가, 성의가, 정심가, 수신가, 제가가, 치국가, 평천하가의 9수이다.

 

남명의 시조 창작 전통은 세계문화유산 남계서원의 창건주 개암(介菴) 강익(姜翼, 1523-1567)의 <단가삼결(短歌三闋)>과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의 <만수산가(萬壽山歌)>, <모부인수연가(母夫人壽宴歌)> 및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1537~1597)의 <사모부인수연가(師母夫人壽宴歌)>가 그 맥을 이었다.

 

남명은 산해정에서 <대학팔조가> 9수의 연시조를 지어 수제자 내암에게 써주었다. 신어산 산해정은 남명을 향사하는 신산서원의 유적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퇴계, 율곡과 나란히 시조로 백성을 교화하는 선비정신의 문학창작 산실로서 기념할 만한 곳이다. <대학팔조가> 시조문학 명작의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