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성균관대 교목(校木) 은행나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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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원임 성균관 부관장, 전 건국대 자연과학대학장
1. 유교를 상징하는 은행나무(Ginkgo biloba L)
유교의 선사(先師)라 일컬어지는 공자(孔子)가 큰 은행나무 아래에서 빈번히 제자들에게 강론을 하였다는 장소에 행단(杏壇)을 조성하고 기념한 것에서 유래한다. 또한 공자가 생전에 은행나무를 좋아했으며 공묘(孔廟; 공자의 사당) 주변에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에 의해 공자를 따르는 유림들이 은행나무가 유교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기게 되었다.
그 때문에 유교의 본산(本山)인 성균관을 비롯하여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전국의 230여 개소 향교에도 대부분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고, 유림들은 존귀한 공자의 뜻을 받들어 은행나무를 소중히 여기면서 보전시키고 있다.
2. 성균관 내의 은행나무 유래
성균관 내의 교육관인 명륜당 앞 광장 끝 우측에 1520년(중종14)에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윤탁이 심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몇 년생을 심었다는 구체적 내용은 없다. 아마도 10년생 이상 정도의 나무를 심었다고 가정해도 현재의 나이가 500년이 넘는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성균관의 모든 시설이 화재를 입으면서 은행나무도 1600년경에 다시 심었을 거라는 추정이므로 이 또한 400년생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지금은 외관상 지면 높이 1미터 미만에서 줄기가 여러 갈래로 성장한 모습인데, 이는 은행나무 생장 특성상 보기 드문 현상이다. 아마도 은행나무를 심고 누구인가 주지(主枝, 주가 되는 가지)를 절단시켜 곁가지를 성장시킨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수령을 측정키는 쉽지 않지만 생장추(lncrement boror)를 사용해서 측정할 수 있다.
긴 세월을 살아온 흔적을 말하듯 줄기는 부분적으로 외과수술을 받았으며 굵은 곁가지들이 밑으로 처진 것을 여러 개의 지주목으로 떠받치고 있는데, 이 은행나무는 암(♀) 나무로서 열매가 많이 달렸으나 근래에는 결실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주변에 은행나무의 숫(♂)컷이 없어져 꽃가루받이가 되지 못하는 상황인 것 같다.
은행나무는 ·수 나무가 다른 자웅이주(雌雄異株)의 대표적 수종이다. 잎이 넓어 활엽수처럼 보이지만 식물학적으로 나자식물(裸子植物)로 분류됨으로 침엽수에 속한다. 즉 열매가 자방(子房) 조직에 둘러싸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매 수확을 위해서는 암나무를 심어야되겠지만 열매의 외종피(外種皮)인 육질 속에 ‘빌로본’과 ‘은행산’이 들어있어 피부질환을 일으키게 된다. 가로수로 심으면 육질의 은행이 도로에 떨어져 미끄럽게 만들어 보행에 지장을 주게 된다. 설치동물들이 은행 열매를 기피하는 까닭에 들이나 산에 자생(自生)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은행나무는 어린 묘목일 때 암·수 구별이 쉽지 않다.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암나무는 곁가지가 옆으로 뻗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도입된 피라밋 은행나무(var. fastigiata Hort)는 암·수 구별 없이 곁가지가 위로 뻗어 마치 빗자루 형태로 되므로 암·수 구별이 어려워진다.
이에 약품을 사용해서 암·수를 감별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즉 잎이 4~5개 달린 가지를 채취하여 일반 수도물에 24시간 담근 후 0.03%의 염소산칼리(KClO₃) 용액에 담궈 24시간 암실(暗室)에 두었다가 꺼내서 햇볕을 쪼인다. 이때 약해를 입은 것은 암나무로 판정된다. 은행나무는 종자를 심으면 15년 이상 경과해야 암나무의 경우 열매가 달리지만 접목묘(Grafts)를 생산하면 5년 이내에 열매가 맺게 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암·수나무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은행나무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고생대(古生代; 2~3억년 전)로 추정되고 생태적 안정기는 쥬라기(Jurassic; 1억 8천만 년부터 1억 3천만 년)이며, 생육환경에 적응력이 뛰어나 급격한 생육환경 변화에도 잘 적응되어 금세기에 이른 유일한 수종이다. 전 세계에 분포되었지만 극심한 빙하기(氷河期)에 유럽 지방 은행나무는 멸종되고, 빙하기가 없던 아시아 북부지방의 중국 양자강 유역이 은행나무 자생지였다.
은행나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유교와 불교가 중국에서 도입된 삼국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공자의 후예로서 은행나무를 부둥켜안고 훌륭한 선비가 될 것을 다짐하였기에 조선왕조시대에 극심한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의 소용돌이에서도 청렴결백한 청백리(淸白吏)가 200여 명이나 배출되었다. 만세종사이신 공자의 지고(至高)한 뜻을 받들어 그들은 탐관오리가 되지 말고 만인의 귀감이 되는 존귀한 인생의 길을 걷고자 다짐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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