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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시론

특별기고 - 천년을 바라보는 강릉향교

편집부
2017.12.30·9분 읽기·조회 41

지난 2013년 강릉향교는 700주년 기념 행사를 1,2부로 나누어 성대하게 치르고 『강릉향교700년사지(江陵鄕校700年史誌)』도 발간했다.

 

강릉향교는 고려 충선왕 5년(1313년) 강릉존무사(存撫使) 김승인(金承仁)이 화부산록 현재의 향교 기지(基地)를 개기(開基)하여 향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화부산향교설립 율시(律詩)’에서 “강릉에는 옛날 내외향교(內外鄕校)가 있었으나 병화로 불타버린 지 거의 200년이 되도록 중창을 하지 못하였으며, 그 기지는 강릉시 동남쪽 광정리(廣汀里)라고 일러오고 있으나 이에 관한 기록이 없어 문헌상으로 고증(考證)할 수는 없다”라고 밝히고 있어 강릉향교의 역사는 이미 900년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설립된 향교가 채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1411년에 또 다시 불타버렸으나 제때 복원을 하지 못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일체의 토목사업을 금(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번거로워 하고 있어 사실상 중건이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68명의 유림(儒林)과 함께 강릉대도호부 판관(判官) 이맹상(李孟常)은 각 마을에서 각각 장정(壯丁) 한 사람씩을 뽑고, 일 없는 사람이나 수행하는 승려를 모집하여 향교재산으로 그 비용을 충당하면 중건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면서 청원(請願)을 조정에 진달하여 1413년에 역사적인 중건이 이루어진다.

 

이후 강릉향교는 수십 번의 중건과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며 그 전통을 자랑하게 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다고 그냥 전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강릉향교의 전통은 교궁(校宮) 수호와 함께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유림제현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릉향교 700년의 역사와 함께한 강릉향교의 전통은 어떻게 보전되고, 계승발전을 했는지 그 배경과 노력을 되짚어 본다.

 

강릉향교는 영동지방의 지리적 중심지인 강릉의 지역발전과 함께 일찍이 유학정신이 크게 보급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지역문화의 정신적 동량(棟梁)이 되어 왔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 강릉향교의 중건을 위하여 공장(供狀)에 서명한 68명의 유림 가운데 18명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을 뿐 아니라 강릉향교를 거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사람은 모두 408명에 이른다. 실로 유학이 인재양성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또한 강릉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일찍이 계(契)문화가 발달해 있었고, 계의 종류와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계(契)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과 입신출사(立身出仕), 친목도모(親睦圖謀)와 상부상조(相扶相助)를 목적으로 결성되어 지역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특히 금란반월계(金蘭半月契)의 경우는 세조 12년(1466년) 강릉 오죽헌댁의 주인인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을 사석(師席)에 모시고 젊은 유학(幼學) 15명(半月)으로 창계(創契)가 된다. 이들 회원 15명 가운데 12명이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이들 중 7명이 문과에 합격하여 다음과 같이 약력이 기록되어 있다. 즉 생·진 양시(兩試)에 합격한 자 1인, 현감(縣監)을 지낸 자 2인, 생원(生員)이 4인, 통덕랑(通德郞) 1인, 훈도(訓導)가 3인, 헌납(獻納)이 1인, 교리(校理)가 1인, 부사(府使)가 1인, 사인(舍人)이 1인, 군수(郡守)가 1인 등이다.

 

강릉은 동부여와 동예의 수도가 있던 곳으로 경(京)에서 주(州)로, 그리고 부(府), 목(牧), 도호부(都護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계속 승격되면서 한때는 울진을 비롯한 삼척, 양양, 간성, 고성, 통천군(흡곡현) 등 관동 지역은 물론 평창, 정선, 홍천 일부 지역까지 관할하는 행정·문화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정조 15년(1791년)에는 강원감영으로부터 석전제에 사용하는 어포(魚脯) 등 제수(祭需)를 줄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불응하고 종전과 같이 되돌려 달라고 전체 유생(儒生)의 명의로 간청(懇請)을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전통(傳統)을 지키자는 것이고, 작은 고을이 아니라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즉 “조선의 향교제도는 웅주거읍(雄州巨邑)의 경우 동·서무가 태학(太學)의 규모와 동일하며, 그 향사의례(享祀儀禮) 역시 소읍(小邑)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강릉은 큰 고을로서 석채(釋菜)의 품식(品式)은 성헌(成憲)이 작성되어 운영되어 온 지 400여 년으로 그 동안 개정되지 않고 준수(遵守)되어 왔다”라는 것이다.

 

관찰사는 끝내 불허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금리(錦里) 민백조(閔百祚)가 수장(首長)이 되어 나라에 다음과 같은 상소(上疏)를 하기에 이른다.

 

“신등(臣等)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초야의 인재는 학궁(學宮)에서 길러내고 있어 학궁은 이들의 귀의처(歸依處)로 하례(夏禮)동시(冬詩)로 장수(藏修)의 공(工)을 닦고 춘추로 제수 올림이 사전(祀典)에 따라야 함을 알고 있는 바이며 성대(聖代)는 문(文)을 가추고 예(禮)가 융성하여 비록 하향(遐鄕)벽읍(僻邑)이라 할지라도 석채(釋菜)의 품식(品式)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신등(臣等)이 벌레와 같이 천(賤)하기는 하나 조화도견(造化陶甄)중(中)의 일물(一物)로 우매(愚昧)를 헤아리지 않고 만사(萬死)를 무릅쓰고 천리를 달려와 이에 상소(上疏)를 하니 사람이 하잘 것 없고 천(賤)할지라도 통촉하시어 신들로 하여금 강릉향교의 석채(釋菜)를 옛날과 같이 할 수 있게 하여 주시면 그러한 다행이 다시 없겠나이다. 신등(臣等)의 황공하고 간절한 지성으로 삼가 목숨을 걸고 상소(上疏)를 올립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4명의 유생과 이들의 형(兄)들도 모두 체포되어 갇히고, 강원도백 윤사국(尹師國)은 탄핵되고, 강릉부사 이집두(李集斗)는 파직되었다. 윤사국(尹師國)은 분노하여 감영(監營) 옥(獄)에서 죽었다. 이때 새로이 유한모(兪漢謨)가 부사로 부임하였고, 안핵사(按覈使) 김희채(金熙采)가 암행어사로 부임하여 관련 유생들에게 형벌을 내리고, 먼 곳으로 유배(流配)를 보내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고종 11년(1874년) 신구 유림들의 교임(校任) 문제로 분규(紛糾)가 일어나 3명의 유림이 한 달 동안 구금(拘禁)되는 일이 있었다. 이 해 가을 어사(御使) 유석(柳奭)이 본부에 와서 유임(儒任)들을 허용하고 아래와 같은 내용의 절목(節目)을 만들고 화해(和解)를 하게 된다. 절목(節目)의 내용은 이러하다.

 

“강릉은 동도의 큰 고을로 사림(士林)이 성하여 그 기대가 큰 곳이다. 그러나 신구유(新舊儒)의 교제(交際)에는 그 국량(局量)이 넓지 못하다. 구유는 신유를 감싸고 이끌어 주는 기풍(氣風)이 있어야 하고 신유는 구유를 추양(推讓)하기에 힘쓰면 구는 신으로 말미암아 더욱 높아 질 것이다. [中略] 열성조(列聖朝) 제왕(諸王)의 순순(淳淳)한 말씀이 일월과 같이 밝을 뿐만 아니라 명유석학(名儒碩學)들의 장주(章奏)가 금석(金石)의 전(典)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따르지 아니하고 서로 상치(相馳)된 의견으로 사세(事勢)만을 더욱 어지럽히고 있어 이에 수조(數條)의 절목(節目)을 지어 걸어 놓을 것이니 제유(諸儒)들은 지켜주기를 바란다.”

 

강릉향교의 문묘에 배향된 성현(聖賢)의 경우에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136위(位)를 고수(固守)하고 있다. 1961년 4월 성균관장(成均館長) 김창숙(金昌淑)이 재임 시 동·서무에 봉안한 115위 중 한국 명현(名賢) 18위는 종전대로 봉안(奉安)하되 중국 명현 97위는 철폐(撤廢) 소각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러나 강릉향교는 유림총회를 개최하고 동·서무 철폐는 무사려(無思慮)한 처사라며 “동서제현(東西諸賢)이 각각 자연(自然)과 능연(能然), 화지(化之)와 수지(守之)의 차이는 있다 하되 그 위도(衛道)의 공(功)은 고금일체(古今一体)로 공통인데 지금에 와서 소위(所謂) 유자(儒者)라고 하는 사람이 어찌 그 철폐를 말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학문과 도덕에 국경이나 민족의 한계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와 기독교는 전 세계에 퍼져 있어도 아무런 이의가 없거늘 유독(唯獨) 유교의 제현(諸賢)이 중국인이라 하여 문제되어 철폐하여야 할 이유가 없으니 강릉향교에서는 동서무제현을 종전대로 봉안(奉安)하기로 하되 그 순위(順位)는 한국 명현을 상위(上位)에 봉안하고 중국인 명현은 하위(下位)에 봉안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동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강릉향교에서는 현재까지 동서무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최근에는 장의들에게 유건 대신 다소 귀하고 품위가 달라 보이는 갓을 쓰게 한 일이 있었다. 이것 역시 예가 아니고 전통에 벗어난다는 사유로 곧 바로 원로회의에서 논의가 되어 철회되었다.

 

장구한 세월을 지키는 전통은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조그만 틈도 금방 벌어져 엉뚱한 방향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강릉향교의 전통은 지금도 그 맥(脈)을 이어간다. 매년 40여 명의 장의(掌議)를 영입하고, 향교와 유도회의 조직을 정비하여 전통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어기식 / 강릉향교 유교신문 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