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림시론

<특별기고> 위기의 유교 유산, 지금이 ‘열어 지킬 때’이다

오흥녕
2025.07.27·6분 읽기·조회 62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병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도 피했던 47개 서원에 속한다.

 


 

 

 

 

류한정 성균관 윤리위원, 성균관청년유도회 경북도본부 전 회장, 풍산류씨 서애(西厓)파 15세손

 


 

경상북도 안동시에 위치한 ‘유네스코 세계유교문화유산’ 병산서원(屛山書院)에 관한 소식이 잇따라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드라마 촬영 과정에서의 문화재 훼손, 대형 산불 속 긴박했던 피해 예방, 감쪽같이 사라진 윤석열 전 대통령 방문 기념식수 비석 사건까지 내용은 달라도 ‘보존 체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경고음의 메시지를 동일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렸다고 해서 저절로 지켜지는 법은 없으니 우리는 이 경고에 이제 제대로 답해야 한다.

 

조선시대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더불어 유림 교육과 교류의 핵심 거점이었다. 성균관과 향교가 국가가 주도한 제도권 교육이라면 서원은 민간이 만든 학문 공동체였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서원은 제도 밖으로 밀려났고, 일제강점기의 통치 논리에 맞춰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박탈당한 채 재정난과 무관심 속에서 영향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서원은 성리학적 생활 방식과 의례, 학습의 흔적을 공간과 관습 속에 오롯이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렀고, 유네스코가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인정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이유도 바로 이 ‘살아 있는 유산’의 성격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유교 유산이 맞닥뜨린 위기는 구조적이고 다층(多層)적이다.

 

첫째,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의 가속화는 유·무형 자산의 단절 가능성을 높인다. 제향을 준비하고 서원의 일상을 관리할 사람 자체가 줄어드는 현실은 단순한 숫자 감소가 아니라 전승의 끈이 끊기는 문제다.

 

둘째, 저출산·초고령 사회의 도래는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라는 역설적 상황을 예고한다. 제례를 주관하고 문화재를 돌보는 주체가 사라질 때 아무리 훌륭한 관리 계획도 공허해진다.

 

셋째, AI(인공지능)와 로봇 기술의 급속한 침투는 경전 강독, 암송, 토론 등 전통 교육방식을 기계화할 수 있다. ‘형식’은 대체될지 모르지만 그 속에 깃든 인간적 관계와 공동체적 학습의 가치는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넷째, 기후 위기는 단 한 번의 재해로도 수백 년의 역사적 자산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는 현실을 다시 확인시켰다. 홍수와 폭염, 산불은 이미 일상이 되었고, 문화재 보존의 비용과 위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다.

 

해법은 분명하다. 닫아두는 보존이 아니라, 열어 지키는 보존이다. 

 

‘활용하지 않으면 보존되지 않는다’는 명제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전제가 됐다. 여기서 ‘활용’은 상업화나 관광상품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활용은 곧 참여의 경로를 넓히는 일이니 시민이 서원을 찾고, 지역 공동체가 프로그램을 함께 기획하며, 학생들이 현장에서 배우고 토론할 때 서원은 ‘남의 문화재’가 아니라 ‘우리의 공간’이 된다. 보존은 관심의 총합이고, 관심은 참여에서 나온다. 

 

물론 활용은 방임이 아니다. 촬영·행사 가이드 라인 선정, 방문객 동선 관리, 화재·재난 대응 매뉴얼 확립,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등은 활용과 보존 사이의 균형추다. 정부와 국가유산청, 지자체, 지역 유림과 주민, 전문가가 참여하는 다층적 거버넌스(governance, 과거의 일방적인 정부 주도적 경향에서 벗어나 정부, 기업, 비정부기구 등 다양한 행위자가 공동의 관심사에 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국정운영의 방식)를 통해 명확한 원칙과 표준을 세워야 한다. ‘조심스러워서 못 한다’가 아니라 ‘조심스럽게 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정책적 과제도 적지 않다.

 

첫째, 인력 기반 확보다. 제향·관리·교육을 담당할 청년·시니어 인력을 양성하고, 봉사·인턴·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제도화해야 한다.

 

둘째, 지역 공동체와의 연계 강화다. 서원은 지역 학교, 도서관, 사회적 기업과 협업해 문화교육 허브로 기능할 수 있다.

 

셋째, 디지털 전환 전략이 필요하다. 디지털 트윈(가상 복제), 3D 스캔, 온라인 강의·전시 플랫폼은 물리적 접근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접속 가능한 유산’을 만든다.

 

넷째, 기후위기 대응 인프라를 정비해야 한다. 소방·배수·차열 설비, 비상 대피로, 주변 산림 관리 등 ‘문화재형 기후 레질리언스(resilience, 회복력)’ 모델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국제사회가 인정한 가치에 걸맞은 관리와 활용이 뒤따르지 않으면 등재는 오히려 ‘박제화’의 명분이 된다.

 

세계유산협약이 강조하는 건 ‘보편적 가치의 지속 가능한 전승’이지, 유리벽 속 격리 보존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이 유산을 ‘함께 살아갈 자산’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도 긴급한 과제다.

 

이제 남은 것은 의지와 실행이다.

 

정부는 예산 편성과 제도 정비, 지자체는 지역 네트워크의 촉진자, 유림과 전문가 집단은 원칙의 수호자이자 프로그램 설계자로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언론은 감시와 비판을 넘어 공론장을 열고, 시민은 참여와 관심으로 응답해야 한다. 각자의 몫이 분명할 때에 보존은 공동의 성취가 된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병산서원이, 한국의 서원이, 유교 유산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얼마나 아쉬워할 것인가. 그 ‘아쉬움의 크기’만큼 지금 행동해야 한다.

 

문을 열자. 사람을 부르자. 함께 살아가자. 

 

그래야 오래 간다. 

 

그리고 그 길만이 유산을 진정 ‘유산(遺産)’답게 만드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