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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47은거(隱居)하여 변치 않은 충절(忠節) 간직한 水北亭

편집부
2018.03.15·8분 읽기·조회 22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백마강 규암 나루터 언덕에 위치한 수북정(水北亭)은 광해군 때 폐모(廢母) 논의가 일어나자 양주(楊州)에서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한 김흥국(金興國)이 건립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의 누각이며, 정면의 편액은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의 친필이며 내부의 편액은 전준기(田俊淇) 부여군수의 글씨이다. 수북정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추포(秋浦) 황신(黃愼), 상촌(象村) 신흠(申欽), 약봉(藥峯) 서성(徐渻) 등과 교류했다. 정자 아래 강변 절벽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로 알려진 자온대(自溫臺)가 있다.

 

백제(百濟)의 고도(古都)인 부여(扶餘)는 소부리군(所夫里郡) 또는 사자(泗泚)라고 했다. 백제 성왕(聖王)이 웅천(熊川: 公州)으로부터 이곳을 도읍지로 정하고 남부여(南扶餘)라고 이름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2년에 총관(摠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공주(公州)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縣監)을 두었고, 고종 32년(1895)에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석성(石城), 임천(林川), 홍산(鴻山)이 합쳐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을의 별칭으로 소부리(所夫里), 남부여(南扶餘), 반월(半月)이라 불렀다.

부여는 충청남도 서남부에 위치하여 고을 동쪽은 논산(論山), 남쪽은 금강(錦江)을 경계로 익산(益山), 서쪽은 보령(保寧)과 서천(舒川), 북쪽은 공주와 청양(靑陽)과 인접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을 북쪽에 있는 부소산(扶蘇山)은 진산(鎭山)이다”라고 했고, 택리지(擇里志)에 “부여는 공주의 서남쪽으로, 백마강변(白馬江邊)으로 백제의 옛 도읍터 이다. 조룡대(釣龍臺) 낙화암(落花巖) 자온대(自溫臺) 등은 모두 백제시대의 고적이며, 강변에 맞닿은 암벽이 기묘하고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 또 땅이 기름져서 부유한 자가 많다”라고 했다.

부여읍 동남리에 부여향교(扶餘鄕校), 석성면 석성리에 석성향교(石城鄕校), 임천면 군사리에 임천향교(林川鄕校), 홍산면 교원리에 홍상향교(鴻山鄕校)가 있다. 부여향교 서쪽 10여리 남짓 고을을 감싸 흐르는 백마강 절벽 위에 부여팔경(扶餘八景) 중 하나인 수북정(水北亭)이 있다. 부여팔경은 ‘노을 진 부소산에 내리는 부슬비[扶蘇山暮雨], 낙화암에서 애달프게 우는 소쩍새[落花巖宿鵑), 고란사 새벽에 울리는 종소리[皐蘭寺曉鐘],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빛[白馬江沈月], 백제탑의 저녁노을[百濟塔夕照] 규암 나루로 돌아오는 돛단배[窺岩津歸帆), 수북정 맑은 날의 아지랑이[水北亭晴嵐], 구룡평에 내리는 기러기 떼[九龍坪落雁]’를 말한다.

마이산(馬耳山)에서 발원한 금강(錦江)이 공주를 지나 부여를 감싸 정자 앞에 흐르고, 강 건너 동북쪽에 백제의 도성인 부소산성(扶蘇山城)이 있다. 수북정중수기(水北亭重修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수북정은 백마강 서쪽 언덕의 바위산, 속칭 자온대(自溫臺) 위에 있으니 이는 김흥국(金興國) 선생께서 공부하시던 정자이다. 공은 순천인(順天人)으로 자는 경인(景仁)이요 호는 수북정(水北亭)이다. <中略> 관직을 버리고 백마강가에 숨어 산 곳이 바로 수북정이다. 김장생(金長生), 신흠(申欽), 황신(黃愼) 등 여러 선생과 우의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中略> 세월이 덧없이 흐르고 정자는 헐었도다. 산하는 옛날과 달라서 백마강에 백제교가 가설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거늘 이제 옛 일을 추모하는 뜻에서 수북정을 중수하여 청렴과 절의와 명승의 연유를 오래도록 후세에게 전하고자 하노라.”

정자의 주인인 수북정 김흥국은 광해군 때 폐모(廢母) 논의가 일어나자 양주(楊州)에서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하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후손인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는 수복정의 문집에 붙인 수북정시집서(水北亭詩集序)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계해년(인조1년, 1623)의 반정(反正)으로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고 인륜(人倫)을 바로잡아 명분(名分)이 바르게 되고 도리가 이루어졌는데, 원훈(元勳)이며 지친(至親)으로써 반정 모의에 참여하지 않고 은거하여 한산하게 지내며 스스로 의(義)를 잃지 않은 사람으로는 수북정 김공(金公)뿐이다. 공은 가정(嘉靖) 정사년(명종12, 1557)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 효경(孝經)을 수학하였는데, 자부사군(資父事君)이라는 글귀에 이르러서 ‘효(孝)는 충(忠)의 뿌리이다’라고 하였다. 성장하여 경전의 깊은 뜻을 철저히 연구하여 실용(實用)을 추구하였으니, 문예(文藝)만 숭상한 것이 아니었다. 기축년(선조22, 1589)에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명성이 대단히 자자하였다. 혼조(昏朝, 광해군)에서는 직간(直諫)하였다가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읍(郡邑)의 지방관으로 두루 돌아다녔다. 폐모(廢母) 논의가 일어나자 양주(楊州)에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조(仁祖) 집정 초기에 부제학(副提學)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나 명(命)에 응하지 않고,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에게 ‘이윤(伊尹)과 곽광(霍光)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만 하겠는가?’라고 대답한 것을 보면, 평소 정해 두었던 그의 뜻을 알 수 있다. <中略> 추포(秋浦) 황신, 상촌(象村) 신흡, 약봉(藥峯) 서성(徐渻) 등이 모두 공이 막역하게 지내는 인물들이고, 사계 김장생 또한 공과 왕래하는 것을 즐거워하였으니, 이것은 나무를 보면 산을 알 수 있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천하의 모든 물은 북쪽에서 시원하니, 북[北]은 머리[首]이며 위[上]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충신과 지사는 혁명(革命)이나 위난한 때를 당해도 잠시라도 임금을 잊지 않았으니, 수북정이라 하여 능히 뜻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촌은 수북정팔경(水北亭八景)을 남겨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했다. “백제 왕가의 업도 허무함 그것인데[濟王家業亦徒然] 부평초 같은 삶 백년을 산다 그 누가 말했는가[誰把浮生擬百年] 오직 낙화암 푸른빛만 남아 있어[唯有落花巖翠色] 아침마다 변함없이 초당 앞에 있다네[朝朝不改草堂前] 넓은 강 폭 연무 길고 아득한 모래톱[水闊煙深沙渚遙] 지금까지 나무꾼과 목동도 앞 왕조였음을 안다네[祗今樵牧認前朝] 산 승려는 국가 흥망 상관이 없다던가[山僧不管興亡事] 드맑은 풍경소리 구름 밖을 날아 가네[淸磬一聲雲外飄] 지는 해가 뉘엿뉘엿 물굽이 따라 내려가고[落日依依下淺灣] 강물 바로 중간에 뜬 다리 있네[浮橋正在水中間] 베처럼 빽빽한 동서남북 사람들이[東西南北人如織] 남보다 먼저 한가로움 차지했다고 제각기 자랑이라네[却詫吾生早占閒] 신선의 삼청에 이슬 기운으로 새로 말끔히 씻어[三淸露氣洗新晴] 한 밤중에 평호에서 밝은 달을 본다네[午夜平湖看月明] 은교를 잠시 빌어 은하수로 올라가서[會借銀橋上星漢] 달 궁전 높은 곳에서 난생 소리 들고파[桂宮高處聽鸞笙] 눈 같은 모래벌판 비단 같은 물결인데[平沙如雪水如羅] 늦가을 남호에 기러기 떼 빗겼어라[秋盡南湖鴈陣斜] 원래부터 모래섬에 주살질이 적었기에[曲渚向來矰弋少] 갈대꽃 깊은 곳을 집으로 삼는다네[蘆花深處好爲家] 철 같은 몸통 용 같은 가지 더위잡을 수가 없어[鐵幹虯枝不可攀] 마주나 볼 뿐 무서워 감히 가까이 하겠는가[凜然相對敢相干] 이상케도 매서운 눈 저리 많이 쌓였는데[怪來凍雪深如許] 추운 겨울 견뎌내는 절개 시험 하나보네[應試孤標耐歲寒] 오백년 그 세월이 일장춘몽 이런가[五百年間一夢空] 이끼 낀 돌 지금은 고기 낚는 노인 것이네[苔磯今屬釣魚翁] 멋대로 오고 가는 외로운 돛단배[孤帆隨意往來穩] 푸른 물결 가랑비 속을 뚫고서 들어가네[穿入碧波煙雨中] 황폐한 자온대 유적 사람을 슬프게 하니[荒臺遺跡自傷神] 야생초만 더부룩한데 몇 세월을 보냈던가[野草離離幾度春] 상전벽해 그 모두가 속절없는 일이니[滄海桑田亦閑事] 동풍의 생황소리도 한가한 백성들 차지로세[東風歌管屬閒民]”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