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으로 보는 세상 53장개석과 중정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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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대유학당 대표)
육이는 절개가 돌과 같다. (옳다고 생각한 것을 주저하지 않고 실천하는데) 날을 마치지 않으니 굳고 바르고 길하다. 상에 말하기를 ‘날을 마치지 않으니 굳고 바르고 길함’은 중정하기 때문이다. [豫卦 六二]
중국 국민당정부의 수반이었고, 중화민국의 종신 총통이었던 장개석(蔣介石1887년 ~ 1975년)의 본명은 중정(中正)이다. ‘개석’은 본래 그의 자(字)였는데 이름보다 더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당을 다니면서 『대학』과 『중용』은 물론 『역경』과 『좌전』, 『당시(唐詩)』, 『통감』 등 한학을 두루 배웠다. 그가 중국대륙의 유일한 정부를 세워 통치할 때에 도덕과 유교윤리를 내세운 것도 어려서의 공부에 기인한 것이다.
장개석이 태어나기 전에 일본 법륜사(法輪寺)에서 “亡倭者 石上二人(일본을 망하게 하는 사람은 돌 위의 두 사람이다)”이라는 글이 새겨진 돌이 나왔다고 했는데, 지내놓고 보니 그 “돌 위의 두 사람”이 바로 장개석이었다고 한다.
개석(介石)을 동양식으로 쓰면 石[돌] 위에 介(개)자가 올라가게 되는데, 개자를 파자하면 두 사람이 된다. ‘介’를 좌우로 나누면 왼쪽도 ‘人’이 되고 오른쪽도 ‘人’이 되어서 ‘人人’ 즉 두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장개석이 제2차 국공합작을 해서 일본과의 전면전을 펼치고, 4년 뒤인 1941년에는 연합국의 대일본 전쟁을 이끌어 냈으며, 1943년에는 미국의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과 함께 이집트의 카이로에 모여서 승전 뒤의 한국 등의 일에 대해서 의논하고 결국 45년에 일본의 패망을 이끌어 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쨌든 장개석도 ‘중정’이라는 이름보다는 ‘개석’이라는 자로 더 알려졌고, 본인도 즐겨 썼다고 한다.
장개석의 어렸을 때 이름은 서원(瑞元)이다. 언제 개명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아마도 14세에 『역경』을 완독할 때에 ‘개석’이라는 자와 ‘중정’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리라고 추측을 해본다. 『역경』의 예괘 육이효의 효사와 상전에 ‘개석’과 ‘중정’이 모두 나오기 때문이다. 즉 효사의 ‘介于石(절개가 돌과 같다)’에서 ‘개석’이라는 자를 썼고, 상사의 ‘以中正也[중정하기 때문이다]’에서 ‘중정’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예괘는 다섯이나 되는 음효가 하나밖에 없는 양효에게 잘 보이려고 구애를 하며 즐거워하는 괘상이다. 그렇지만 육이효만은 구사와 인연이 없음을 깨닫고 절개를 지키며 홀로 중정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모두가 서양학문을 공부하고자 할 때 혼자서만 전통학문을 공부함으로써 유교윤리와 도덕성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정치인으로서 성공을 했으며, 모두가 눈앞의 재물을 탐해서 장사를 하고 기타 직업을 가질 때 무력의 중요성을 실감해서 홀로 군인의 길을 택했고, 일본을 두려워하면서 싫어할 때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하고, 소련의 군사학교로 유학을 해서 지식과 견문을 넓혔다. 주변의 환경이나 유혹이 어떻든 간에, 오직 내가 가야 하고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실천한 것이다. 그래서 역에서는 중정한 덕을 바탕으로 내 갈길을 가다 보면 명예도 재물도 다 그 안에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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