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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51耆英亭. 효행(孝行)과 예양(禮讓)에 독실하여 청백(淸白)의 귀감되네

편집부
2018.05.30·10분 읽기·조회 38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사창로에 중종 38년(1543) 전라도관찰사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왕명을 받들어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을 위해 용암천(龍巖川) 옆에 기영정(耆英亭)을 건립했다. 이듬해 지지당을 위로하고 정자 건립을 축하는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나주목사 조희(曺禧)의 주관 아래 전라도관찰사 송인수, 영광, 장성 등 인근 10개 고을 수령과 선비 등이 참석했다. 이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로,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규암의 10세손인 송겸수(宋謙洙)가 영광군수로 부임하여 철종 7년(1856)에 중건하고 편액도 직접 썼다. 예서체의 편액은 송겸수의 친필이며, 해서체의 편액은 위사(韋史) 신창희(申錫禧)의 친필이다.

 

장성(長城)은 백제 때 고시이현(古尸伊縣), 신라 때 갑성군(岬城郡)이라 하였고, 고려 초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 때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효종 6년(1665) 장성현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고을의 별칭으로 고시이(古尸伊), 갑성(岬城), 오산(鰲山), 이성(伊城)이라 불렀다. 동쪽은 담양(潭陽), 서쪽은 영광(靈光), 남쪽은 광주(光州), 북쪽은 전라북도 정읍(井邑)․고창(高敞)과 인접해 있다.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역임한 조종생(趙從生)은 “산은 둘러있고 물은 굽이쳐 흐르니 하늘이 이룬 것이라네[山回水曲自天成]”이라고 고을의 형승을 노래했다. 장성읍 성산리에 장성향교(長城鄕校)가 있다. 장성향교 서쪽 50여리 삼계면 사창로에 유서 깊은 정자가 있으니 기영정(耆英亭)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중종36년(1541,辛丑) 3월에 우참찬(右參贊) 송흠(宋欽)이 연로(年老)함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하자 상(上)이 소견(召見)하여 술을 하사하였는데, 송흠의 이때 나이가 83세였다. 전라감사(全羅監司) 송인수(宋麟壽)가 그를 위해 고향에 기영정(耆英亭)을 지어주어 영화롭게 하였다.”

정자의 주인인 송흠의 본관은 신평(新平), 자(字)는 흠지(欽之), 호(號)는 지지당(知止堂) 또는 관수정(觀水亭)이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공(宋公)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상세히 나와 있다. “우리 중종조(中宗朝) 호남 삼계현(森溪縣)에 어진 대부 휘(諱) 송공(宋公) 흠(欽)이 있었으니 자(字)는 흠지(欽之)이다.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고 벼슬살이를 청빈하게 하였으며, 지위는 숭반(崇班)에 올랐고 대질(大耋: 80세)을 넘기고 졸(卒)하였다. <中略> 세조 5년(己卯,1459) 3월 13일에 태어나 성종 11년(庚子, 148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종 23년(壬子, 1492)에 대과에 급제했다. 연산군의 혼조(昏朝)를 당해서는 고향에 물러나 거처하며 후진을 가르치고 경적(經籍)을 강론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연산군 8년(壬戌, 1502)에 부친상을 당한 후 복제를 마치자 남원교수(南原敎授)에 제수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홍문관(弘文館)과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헌납(獻納), 병조정랑(兵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의 연세가 높기 때문에 외직을 구하여 보성 군수(寶城郡守), 옥천군수(沃川郡守), 순천부사(順天府使), 여산군수(礪山郡守)에 연달아 보임되었다. <中略> 중종 24년(己丑, 1529)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나갔는데, 고을에 재임하는 동안 모친을 봉양하는 데 외에는 처자와 첩, 종은 굶주림과 추위만 가까스로 면할 정도였고 체차되어 돌아갈 때에는 집에 한두 섬의 양식도 없었다. 다스리는 곳마다 염근(廉謹)하다는 이유로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전후로 7번 성상의 옥음(玉音)을 받았으니, 성상이 포상하고 총애함이 매우 컸다. 중종 27년(壬辰, 1532)에 왕이 의정부로 하여금 정신(廷臣) 가운데 청절(淸節)한 성품이 평소 드러나고 연로해도 변하지 않은 자를 선발토록 하교 하였는데, 참찬(參贊) 조원기(趙元紀)와 공을 선발하여 조원기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리고 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려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옮겨 제수하도록 명하면서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려 장려하였다. 중종 29년(甲午, 1534) 전라감사(全羅監司)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모부인의 연세가 99세였으므로 공이 사정을 진달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모친 봉양을 상소하니, 유시를 내리기를, ‘방면(方面)의 직임이 중하니 가볍게 체차할 수 없지만 봉양 때문에 간절히 사직하니 특별히 소청을 윤허한다.’라 하였으니, 공의 나이도 77세였다. 집으로 돌아가 효성을 다해 봉양하여 모친 곁을 떠나지 않고 춥거나 덥거나 의관을 풀지 않았으며 음식물은 반드시 맛을 본 뒤에 올렸다. 모부인이 101세에 임종하니 초상을 예제대로 극진히 치렀고 노쇠하다고 해서 적당히 하지 않았다. 제사도 경건하게 지냈으며 삭망(朔望)을 거르지 않았다. 심지어 조상의 기신(忌辰)에도 반드시 참여하니 나라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특히 중종 14년(己卯, 1519)에 스스로 지지당(知止堂)이라고 호를 지어 낙향하여 예양(禮讓)을 돈독히 숭상하고 명행(名行)을 연마하였으므로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등이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 편액을 ‘관수(觀水)’라고 써서 걸고 직접 시와 서문을 아울러 지어 뜻을 담았다. 기영정 삼계천 건너 북쪽에 관수정(觀水亭)이 있다.

중종 38년(癸卯, 1543)에 또 특명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兼)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제수되었다. 당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본도의 절도사(節度使)로 부임하였는데, 공의 별업(別業)에 가서 정자 하나를 지어 ‘기영정(耆英亭)’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10개 고을의 수령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어 축하해 주었다.”

규암은 “호해의 영검은 우리의 영공이 있게 하였고[湖海維靈有我侯] 일생을 빙얼같이 살아 청고함을 닦았다네[一生氷蘖苦淸修] 주상의 성은이 겹침에 포상이 연달았고[主恩稠疊連褒賞] 부모를 모시고자하는 효심 깊어서 수차례 외직을 청했네[孝意純深數乞州] 서가에는 이삼 천권의 책만이 가득 꽂혀있고[架揷二三千卷帙] 연세 높아서 지금은 팔십 육세라네[年高八十六春秋] 기영정 위에서 좋은 잔치를 벌였으니[耆英亭上成佳會] 단청에 옮기에 살면서 만년을 머무르리[移入丹靑萬世留]”라고 읊었다.

이때 지지당은 기영정연시기(耆英亭宴詩記)를 짓고 시를 읊었다. “천고에 호남의 관찰사가 몇 번이나 바뀌었던가[千古湖南閱幾侯] 송(宋) 상공(相公)의 치화는 자신을 수양함 부터였네[相公治化自身修] 일심에 어찌해 두세 개 덕행이 있으리오[一心寧有二三德] 쇠하여 없어진 온갖 일이 다시금 일어난 오십 주 고을일세[百廢俱興五十州] 다른 날 오늘의 모임을 잊기 어렵고[異日難忘今日會] 다른 해에 이 해의 가을을 어찌 상상하리[他年可想是年秋] 그 중에 어떤 일로 섭섭함과 슬픔을 이겨내리[箇中何事堪怊悵] 무엇보다 한 한스러움은 등공(鄧公)이 떠나감을 만류치 못함이라[最恨鄧公挽不留]”

참판(參判)을 역임한 추담(秋潭) 김우급(金友伋)은 이곳을 지나면서 시를 남겼다. “듣건대 상공이 벼슬을 물러난 때에[聽說相公致仕年] 임금께서 이 곳 임천(林泉)에서 잔치를 베풀도록 하였네[君王賜宴此林泉] 규암의 옥절은 꽃 아래 이르렀고[圭菴玉節臨花低] 고씨(전라도사 高雲)는 연꽃 휘장을 물가에 설치했네[高氏蓮帷倚水邊] 석자의 그림 병풍에는 잔치 장면 그려져 있고[三尺畵屛摸勝事] 일시에 우러러 바라보니 선인(仙人)인가 의심했네[一時瞻望擬羣仙] 호화스러움 사라지고 옛터만이 남았으니[豪華去盡遺墟古] 연기 낀 나무 가지엔 오직 두견새 울음 들려올 뿐[煙樹惟聞哭杜鵑]”

승지(承旨)를 역임한 기천(杞泉) 이희웅(李喜熊)은 “옛날은 지금과 몇 해를 지났는가[昔日今時隔幾年] 번화한 유적은 흐르는 물에 붙이어졌네[繁華遺跡付流泉] 기영정 무너진 언덕에는 푸른 풀만 무성하고[耆英堂破靑莎畔] 관수정 푸른 계곡 변두리도 퇴락하였네[觀水亭頹碧澗邊] 청렴한 덕행은 누구 있어 짝하리오[淸德由來疇作匹] 공명을 이룬 뒤 신선되기를 바랐다네[功名成後願從仙] 그 누가 사업이 이 같음 알았으리[誰知事業曾如許] 오직 깊은 숲에 두견새 울부짖네惟有深林啼蜀鵑]”라고 읊었다.

명종 2년(丁未, 1547) 11월 15일 지지당이 임종하니 나이 89세였다. 명종이 예조정랑(禮曹正郞) 이영(李瑛)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생각건대 경은 성품이 본래 온순하고[惟卿性本溫醇] 행실이 독실하며 간결하였다[行篤簡潔] 처신함에 굽힘이 없고[處己無枉] 학문이 여유로웠다[裕以學術] 맡은 직임을 잘 거행하여[所履職擧] 아름다운 소문이 매우 많았다[美聞弘多] 정성을 다하여 부족한 정사를 보익하고[罄悃補闕] 엄숙한 위의로 조정 반열에 섰다[儀肅鵷列] 어버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愛日心長] 누차 남쪽 고을 맡기를 청하였다[屢乞南符] 즐거움이 뜻을 봉양하는 데 있었으니[樂在養志] 호호백발로 색동옷을 입었다[皓髮斑衣] 마침내 황야로 물러나 은둔하며[竟遯荒野] 정신을 함양하고 한적함을 보전하였다[頤神保閑]” 하였으니, 공의 평생이 여기에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하겠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