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52山映樓, 수려한 산 빛 맑은 물에 잠겨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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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위치한 산영루(山映樓)는 수려한 북한산의 풍광이 물에 비친다고 이름 지어졌다. 누각은 북한산성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자리한 중흥사(中興寺) 앞 계곡에 세워져 있어 수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와 풍광을 노래했다. 을축년(1925) 북한산 일대에 큰 피해를 입힌 홍수로 유실되어 10개의 초석만 남아있는데, 2014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복원되었다.
고양(高陽)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 고봉현(高峯縣)과 덕양현(德陽縣)을 합친 지역이다. 원래 고봉현은 고구려 달을성현(達乙省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고봉이라 개칭하여 교하군(交河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 개백현(皆伯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우왕(遇王) 혹은 왕봉(王逢)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 행주 또는 덕양(德陽)이라 했다. 조선 태조 3년에 고봉감무(高峯監務)를 설치하고 행주, 부원(富原), 황조향(荒調鄕)을 고봉에 예속시켰다. 태종 13년에 고봉과 덕양 두 현을 합쳐 고양으로 이름하여 현감을 두었다가 성종 2년에 경릉(敬陵: 덕종과 소혜왕후의 릉)과 창릉(昌陵: 예종과 안순왕후의 릉)이 있어 군으로 승격하였다. 고을의 별칭으로 달을성(達乙省), 고봉(高峯), 행주(幸州), 덕양(德陽)이라 불렀다.
고을 동북쪽은 양주(楊州), 동남쪽은 서울, 서남쪽은 김포(金浦), 북쪽은 파주(坡州)와 인접해 있다.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위치한 고양향교(高陽鄕校) 남동쪽 북한산성내 중흥사 앞에 유서 깊은 누각이 있으니 산영루(山映樓)이다. 태고사 계곡과 중흥사 계곡이 합수되는 곳에 북산산의 수려한 풍광이 맑게 비친다고 하여 이름 붙였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는 선조36년(1603) 9월 삼각산을 유람의 기록한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걸어서 산영루(山映樓)의 옛터로 내려왔다가 이어 향옥탄(響玉灘)으로 갔다. 때는 첫서리가 내린 지 겨우 몇 밤이 지난 터라 단풍은 성성이의 피로 물들인 듯 붉고 푸른 솔과 노란 국화가 시냇가 골짜기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 참으로 금수(錦繡)의 세계였다”라고 하여 당시 누각이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1657)는 북한산을 찾은 유북한산기[遊北漢記]에 누각을 중수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다 중흥사(中興寺)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경리청(經理廳) 별관과 백여 칸의 창고가 절의 전후좌우로 이어져 있었다. 승려들이 산영루를 다시 수리하여 단청 공사를 이제 막 끝낸 상태였다. 자리를 펴고 난간에 기대니 물에 산 그림자가 위아래로 비쳤다. 눈과 귀가 모두 맑아지고 정신과 뼛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라 매우 즐거웠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삼각팔경시(三角八景詩) 중 산영루의 갠 달[山映樓霽月]’에 차운시를 남겼다. “둥근 달은 구름을 헤치고 나오고[團月披雲出] 누대는 높아 반쯤 허공에 들었네[樓高半入空] 위에서 어느 누가 휘파람 불 제[上有人舒嘯] 아래에는 물소리가 영롱하여라[下有水玲瓏]”
영조 43년(1767) 성호의 제자인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가 27세 때 이곳에 올라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했다. “항해교(杭海橋) 다리 앞에 서 있는 산영루[杭海橋前山映樓] 수석(水石)을 굽어보면 어이 이리 그윽한지[登臨水石一何幽] 깎아지른 세 봉우리 연꽃처럼 서 있고[芙蓉削出三峯立] 수많은 폭포수에 옥 같은 눈 날리구나[玉雪飛來萬瀑流] 승려는 석양 받으며 암자로 들어가고[僧帶夕陽投寺崦] 안개 뚫고 나온 새는 처마 밑에 깃드네[鳥穿煙樹上簾鉤] 사람이 명승지를 차지했다 하지 마소[莫言勝地人能占] 하늘이 이 바위를 만든 지가 언제겠소[天作巖臺問幾秋]”
영조 37년(1761)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는 북한산을 유람한 기유북한(記遊北漢)에서 이곳의 기록했다. “산영루는 중흥사에서 비스듬히 걸어 서쪽으로 가면 숲이 하늘을 가리우고 맑은 시냇물이 콸콸 흐른다. 갓[冠]같기도 하고 배[舟]같기도 한 큰 돌이 많은데, 쌓이고 쌓여 대(臺)를 이룬 것도 간혹 있었다.” 또한 “차가운 숲 깊은 산 가을이 서렸는데[寒木深山動九秋] 돌다리 동쪽 언덕 높은 누각 서 있구려[石橋東畔得高樓] 맑은 샘의 양치질 정신이 개운해라[漱泉已有翛然意] 남에게 이 놀이를 말하지 마시게나[休向人間說此遊]”
정조 28년(1794)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그의 형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과 산영루를 유람하여 시를 남겼다.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巖蹊纔斷見危欄] 겨드랑에 날개 돋쳐 날아갈 것 같구나[雙腋泠泠欲羽翰] 십여 곳 절간 종소리 가을빛 저물어가고[十院疏鍾秋色暮] 온 산의 누런 잎에 물소리 차가워라[萬山黃葉水聲寒] 숲 속에 말 매어두고 얘기 꽃을 피우는데[林中繫馬談諧作] 구름 속에 만난 승려 예절도 너그럽네[雲裏逢僧禮貌寬] 해 지자 흐릿한 구름 산빛을 가뒀는데[日落煙霏鎖蒼翠] 행주(行廚: 여행도중 임시로 밥 짓는 부엌)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오네[行廚已報進杯盤]”
정조 18년(1816)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도 이곳에 와서 풍광을 노래했다. “온통 붉게 물든 숲속에[一一紅林裏] 굽이치는 시내와 갈라진 봉우리들[廻溪復截巒] 먼 종소리 비에 잠겨 고요하고[遙鍾沈雨寂] 그윽한 범패는 구름 속에 싸늘하네[幽唄入雲寒] 오래된 바위는 전생을 추억하고[石老前生憶] 산이 깊어 종일토록 바라보게 되네[山深盡日看] 구름 안개 걷히지 않으나[煙嵐無障住] 오솔길은 반갑게 사람들을 맞이하네[線路向人寬] 일천 봉은 어지러이 둘러쌌는데[千峯紛匼匝] 찬비는 산 누각에 가득하네[寒雨滿山樓] 태고승(臨濟宗) 동쪽으로 돌아오는 날[太古歸東日] 진흥왕 북방을 순행 했네[眞興狩北秋] 험한 산지에 보루를 쌓아[險要由地設] 드넓은 하늘 아래 유람했네[漫汗作天遊] 수놓은 듯 아름다운 골짜기 이를 아는 듯[繡谷知如此] 무성한 숲 이뤄 매끄럽게 흐르려 하네[林林膩欲流] 봉우리 그림자 멋대로 옆으로 기울고[峯影隨橫側] 누각을 비추니 누각 안이 가득 차네[在樓仍滿樓] 허공에 버티고 있는 둥근 기운[支空團一氣] 힘을 모아 가을을 붙잡고 있네[積健束高秋] 형산(衡山)의 한 봉우리인 석름(石廩)과 나란히 묘한 상을 이루고[石廩聯奇相] 황산(黃山)의 최고봉인 천도(天都)와 호쾌함을 겨루고 있네[天都較壯遊] 응당 원력을 다 베풀어서[秪應施願力] 천지의 축이 서류를 진압하겠지[坤軸鎭西流]”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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