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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53無盡亭. 백세청풍(百世淸風)의 절의(節義) 다함이 없네

박광영
2018.06.30·8분 읽기·조회 39


 

 

무진정(無盡亭)은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절의(節義)로 이름난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손자인 무진(無盡) 조삼(趙參)이 은둔하여 정자를 짓고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의 누각이다.

 


 

함안(咸安)은 아시량국(阿尸良國)으로 아나가야(阿那伽耶)으로 부르기도 했다. 함안, 진주, 창원, 의령을 중심으로 형성된 아라가야는 금관가야와 대가야 등과 함께 6가야의 하나였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이곳을 정벌하여 시키고 그 지역을 군(郡)으로 만들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의 명칭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成宗) 때에는 함주자사(咸州刺史)로 만들었고, 현종(顯宗)이 지금 명칭으로 복구하여 금주(金州: 지금의 金海)에 예속시켰다. 공민왕(恭愍王) 22년에 다시 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 세조 12년 군(郡)으로 고쳤고, 선조 34년에 진해(鎭海)와 합쳤다가 광해군 9년에 나누었고, 인조 7년에 다시 진해와 합쳤다가 17년에 나누었다. 한편 칠원(漆原)은 신라 때 칠토현(漆吐縣)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칠제(漆隄)라고 고쳤다가 초기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 김해부(金海府)에 예속시켰으며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조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함안은 경상남도 중남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창원(昌原), 서쪽은 의령(宜寧)과 진주(晉州), 남시와 고성(固城), 북쪽은 남강(南江)과 낙동강(洛東江)을 경계로 창녕(昌寧)과 의령(宜寧)에 인접해 있다. 고을의 별칭으로 아시량(阿尸良), 아나가야(阿那伽倻), 함주(咸州), 금라(金羅), 사라(沙羅)라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을의 풍속은 검소하고 솔직하다”라고 했다. 고을 서남쪽 진산(鎭山)인 여항산(餘航山)과 방어산(防禦山)이 있고, 동쪽에 무릉산(武陵山)이 있다.

 

함안군 함안면에 함안향교(咸安鄕校)가 있고, 함안군 칠원읍에 칠원향교(漆原鄕校)가 있다. 함안향교 북쪽 8여리에 함안면 괴산리에 유서 깊은 정자가 있으니 무진정(無盡亭)이다. 정자에 백운동사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기문이 있다.

 

신재가 48세 때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었는데, 기문은 이듬해 썼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이 동쪽으로 삼 백리를 달려와, 허공을 가로 절반으로 끊어내는, 말갈기를 털어 낸 듯 파도처럼 솟구쳐 올라 함안(咸安)의 진산(鎭山)을 만들었으니 여항산(餘航山)이다. 그 산 줄기 하나가 훨훨 날아와 십리에 못 미쳐 엎드려 다시 솟아났으니 마치 자줏빛 봉새가 병아리를 품 듯 그 위에 자리잡은 고을이 있으니 바로 함안이다. 성산(城山)이 왼팔을 꿈틀꿈틀 뻗어 서북쪽으로 이리저리 구불어 세차게 뛰어 기세를 만들었다. 군성(郡城)을 둘러싸 마침내 동쪽 청천(淸川)에 다다르니, 마치 교룡(蛟龍)이 물을 축이며 고개를 높이 올리듯 하여 하여 꼭대기에 도리와 서까래를 얹었으니, 바로 무진정(無盡亭)이다. 정자와 고을의 거리는 소 울음소리 들리는 지척으로 바로 목사(牧使) 조(趙) 선생이 새로 거처한 동고(東皐)이다.”

 

기문에 언급한 정자의 주인은 무진(無盡) 조삼(趙參)으로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손자이다. 어계는 관란(觀瀾) 원호(元昊),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문두(文斗) 성담수(成聃壽),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단종(端宗)에게 절의(節義)를 다한 생육신(生六臣)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여섯 분의 충절과 덕의를 숭모하여 숙종 29년(1703) 함안군 군북면에 사우를 건립하고 숙종 39년(1713) 서산서원(西山書院)으로 사액되었다. 어계의 본관은 함안으로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어계의 손자인 무진은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기문에 정자를 만든 과정을 이렇게 기술했다. “선생이 이 언덕을 얻어 머물게 되셨는데, 처음에는 큰 길 옆 버려진 언덕이었으나 이제 오가는 고을 사람들로 시끌시끌한 곳이 되었다. 아라가야가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숨겨놓고 땅이 감추지 않았지만 이 길을 오가는 이가 하루 수천 명이었으나, 미처 이 같은 승경을 알아 정자를 짓는 이 없었다. 오직 선생이 한 번 보고는 땅을 얻어, 가시나무와 개암나무 등의 잡목을 걷어내고 정자를 지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무진은 신재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옛 길을 옮기고 수려한 나무를 심고는, 장후(蔣詡: 서한(西漢) 말의 문인으로, 은거하여 집 안 뜨락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했다)의 오솔길을 몰래 냈더니, 꽃나무와 대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높다란 기와는 높이 날아올랐으니 노복들의 집은 언덕 밖에 있다. 지나가는 자들이 정자를 보고는 ‘선인(仙人)이 머무는 곳 같다’하였다. 선생이 내게 ‘내가 무진(無盡)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자네는 나를 위해 기문(記文)을 써주지 않겠나?’하였다. 내가 매양 선생을 뵈올 때마다 문득 나를 인도해 올랐기 때문에 마침내 그 좋은 경치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무릇 두 칸을 두어, 서쪽으로 온돌방을 두고, 동쪽과 북쪽으로는 모두 창을 내었으며, 창밖으로는 바둑판처럼 기단을 쌓았는데, 그 아래는 깎아지는 절벽이다. 큰물이 남쪽에서 흘러와 물길이 모여 맑은 거울 같고 굽이 돌아가니 옥대와 같고, 흐르는 물소리는 맑은 옥과 같고, 암벽을 따라 돌아 풍탄(楓灘)으로 흘러 들어간다. 시냇가 벽오동은 가히 천여그루는 됨직하고, 동쪽으로는 보이는 봉우리에 울창한 소나무와 전나무가 십리를 뻗어가네.”

 

또한 기문에 “선생은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 등의 고을 수령을 맡으셨다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은거하셨으니, 푸른 산과 흰 구름은 병풍이 되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손님이 되어, 흥겹게 시를 읊고 느긋하게 휘파람 부르면서, 쓸쓸한 듯 그윽한 듯, 고요한 듯 적막한 듯, 한가로운 듯 즐거워하며 화목해하셨으니, 그 즐거움은 만종(萬鐘)의 돈으로도, 경상(卿相)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았다. 무릇 벼슬살이가 영화로우나 욕됨이 있어, 군자는 용감히 물러나는 것을 훌륭하게 여겼다.”라 하여 무진의 고매한 기상과 인품을 알 수 있다.

 

“능히 천명을 알았기에 용감히 물러났고, 능히 용감히 물러났기에 능히 이와 같은 즐거움이 있었다. 정자의 경치가 다함이 없고, 선생의 즐거움 또한 다함이 없다. 다함이 없음이 다함이 없음을 만났으니, 정자의 이름과 선생의 이름이 모두 다함이 없음을 환히 알겠네.”라며 무진(無盡)의 의미를 나타냈다. 신재의 연보에 의하면 합천 천곡리(泉谷里)에서 태어나 7세 때 부친을 따라 칠원 무릉리(武陵里)로 이거했다.

 

창녕 고암면 원촌리에서 태어난 암서(巖棲) 조긍섭(曺兢燮)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등 영남의 석학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옛적 현자가 위태한 때 만나 돌아가 은거하니[昔賢歸隱値危時] 종산([南齊 때의 周彦倫이 은거하던 곳]의 신령이 거절하는 글 보내지 않았네[不見鍾山有勒移] 서사에서는 고사전 따라 행하려 하고[書史追攀高士傳] 노년에는 미인과의 약속 몇 번이나 바랐던가[黃昏幾望美人期] 십 년의 생소한 나그네는 여부(廬阜: 중국 강서성에 있는 廬山)에 부끄럽고[十年生客慚廬阜 천고의 이름난 정원은 습지(중국 호복성 襄陽의 峴山 남쪽, 高陽池라고 함)를 헤아리네[千古名園數習池] 여러 공들 함께 만류하는 뜻 지극함에 사례하니[多謝諸公勤共挽] 떠나는 행차 출발하려다 짐짓 머뭇거리네[征驂欲發爲棲遲]”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