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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55巖棲齋. 학문을 닦아 게을리 하지 않고[藏修]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학문과 춘추(春秋) 의리(義理)를 지키네

박광영
2018.08.03·9분 읽기·조회 28

 

 

암서재(巖棲齋)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리(華陽里)에 위치한 서재로, 화양구곡(華陽九曲) 중 제4곡 금사담(金沙潭) 물가의 큰 반석에 있다. 현종 7년(1666)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이곳에 와서 화양계당(華陽溪堂)이라는 초옥을 짓고 살다가 3년 후 주자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본따 3칸의 정사를 지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후 퇴락되어 숙종41년(1715) 청주목사 김진옥(金鎭玉)이 중건한 이후 중수를 거듭했다.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보수한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괴산(槐山)은 고구려 때 잉근내군(仍斤內郡),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괴양군(槐壤郡)으로 고쳐 한주(漢州: 지금의 廣州)에 속했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서 괴주(槐州)로 고쳤다가 현종(顯宗) 9년(1018)에 충주(忠州)에 속한 후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 태종(太宗) 3년(1403)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하고, 13년에 괴산군으로 명명했다. 괴산군과 연풍현(延豐縣), 청안현(淸安縣)이 합쳐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괴산(槐山)은 충청북도에 있는 고을로, 소백산맥(小白山脈)이 동남쪽에 뻗어 있다. 북쪽으로는 충주(忠州)와 음성(陰城), 동쪽으로는 제천(堤川)과 경북 문경(聞慶), 남쪽으로는 경북 상주(尙州)와 보은(報恩), 서쪽으로는 청원(淸原)과 진천(鎭川)과 인접한다.

 

고을의 별칭으로 괴양(槐壤), 괴주(槐州), 시안(始安)으로 불렸다. 괴산군 괴산읍에 괴산향교(槐山鄕校), 연풍면에 연풍향교(延豊鄕校), 청안면에 청안향교(淸安鄕校)가 있어 지방 교육을 담당했다.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유서 깊은 정사(精舍)가 있으니 암서재(巖棲齋)이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암서재중수기(巖棲齋重修記)에 “화양동(華陽洞) 수석(水石)의 훌륭한 경치가 호남과 영남 가운데 으뜸인데, 우암 선생이 병오년(현종 7년, 1666)에 정사(精舍)를 그 시내 남쪽에 지으니, 참으로 세속 밖의 그윽한 지경이다. 정사의 동쪽으로 한 사람이 부르는 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 가파른 석대(石臺)가 있는데, 그 높이가 수십 척(尺)이 되고, 위에는 백여 명이 앉을 만하니, 이 또한 천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선생이 일찍이 여기에 3칸 소재(小齋)를 짓고 수시로 여기에서 유식(遊息)하면서 매우 즐거워하였다.”

 

또한 기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선생이 일찍이 이르기를 ‘회덕(懷德)으로부터 이 골짜기를 들어오면 심신이 상쾌하여 마치 선경(仙境)에 있는 것 같아 여기서 회덕을 돌아보면 회덕은 참으로 진세(塵世)이더니, 정사로부터 다시 북재(北齋)로 옮긴 뒤에는 북재는 더 좋은 선경이라서 정사가 도리어 진세처럼 보인다. 이곳은 십분 맑고 신기하다 이를 만하니, 어찌 다시 무릉도원(武陵桃源) 길을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하였다. 그 대(臺) 아래는 깊은 못이 있어 충분히 뗏목도 배도 띄울 만하였으므로, 가끔 일엽편주를 띄우고 물결 따라 오르내리다 보면 물이 밑바닥까지 환히 보이도록 맑아서 물고기를 하나하나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밤에 헌창(軒窓)을 기대고 있노라면 마치 낮과 같이 환한 달빛이 영롱하게 서로 비추어 수정세계(水晶世界)를 방불케 하였다. 선생이 여기에서 지팡이를 끌고 시문을 읊으면 소리가 금석(金石) 같았고, 언뜻 세속 밖에 우뚝 서 있는 듯 한 생각이 있었으니, 무이정사(武夷精舍) 띳집의 맑은 흥취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우세했을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기사년(숙종 15년, 1689)의 참화를 당한 뒤로 재사(齋舍)가 무너지고 산 어귀가 적막해져 버리니, 지나는 이들이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러다가 을미년(숙종 41년, 1715)에 김후백온(金侯伯溫: 金鎭玉)이 재력(財力)을 내서 재사를 중건(重建)하였는데, 크지도 작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아서 의연히 옛날의 모양을 갖추었다. 이렇게 되자 후생(後生) 소자(小子)들이 모두 그곳에 올라가 선생을 상상하매 마치 춘풍(春風) 속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또 김후의 정성을 칭송하는 것도 자자하였다. 금년 봄에 김후가 화산백(花山伯)이 되어 부임하는 길에 황강(黃江) 가로 나를 찾아와서 나에게 ‘암서재(巖棲齋)’ 세 글자를 쓰게 하여 이를 목판에 새겨서 문 위에 걸고 또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 당시에 선생을 가까이서 모셨던 소생이었기에 감히 글을 못한다 해서 사양하지 못하고 내가 보고 기억나는 것들을 이상과 같이 대략 기록한다. 옛날에 반도(蟠桃) 한 그루가 바위틈에 나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노승(老僧)이 일찍이 암자 뜰에서 종자를 취해 두었는데, 가을이 되면 예전과 같이 많이 심을 것이라고 한다. 숭정 후 신축년(경종 원년, 1721) 5월 일에 문인 권상하는 삼가 기록한다.”

 

현종 10년(1669) 우암 나이 63세 때 정사에서 시를 읊었다. “시냇가 바위 벼랑 펼쳐진 곳[溪邊石崖闢] 그 사이에 집을 지었노라[作室於其間] 조용히 앉아 경서의 가르침 찾아서[靜坐尋經訓] 시간을 아껴 높은 곳에서도 오르리라[分寸欲躋攀]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의 손자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은 암서재에 묵고 차운시를 남겼다. “정사(精舍)가 참한 게 몹시도 맘에 들어[爲憐精舍好] 하룻밤을 여기 암서재에서 묵는다오[一宿此巖間] 잠자리에 들려오는 물소리 차갑고[枕席鳴泉冷] 소나무 사이 조각달은 고즈넉하네[雲松片月閒] 두 분 황제 모신 사당[萬東廟: 明나라 神宗과 毅宗을 모신 사당]에 두견새 울어대는데[啼鵑二帝廟] 계수나무 총생[桂叢: 산림에 은거]한 곳 몇 겹의 산중이런가[叢桂幾重山] 산림에서 한평생 보내리라 작심하니[林下終身計] 바람인즉 대로(大老: 尤菴)의 뒤 밟고 싶은 것이라오[願依大老還]”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인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은 운한각((雲漢閣: 의종의 어필과 숙종의 어필인 화양서원 편액 봉안을 위해 지은 亭閣)에 올라가 파계구곡(巴谿九曲)의 첩첩 산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 “날듯이 높이 솟은 누대에 은하수 드리우니[飛閣崢嶸雲漢垂] 파계 천 봉우리의 그림자 어슷해라[巴谿千嶂影參差] 그윽한 향기 누각에 드니 들꽃이 가까이 핀 것이요[幽香入檻野花近] 새로 내린 비 못에 가득 차니 봄물이 불어난 것일세[新雨滿池春水滋] 암서재(巖棲齋)에서 글 읽는 밤 달빛은 고요하고[月靜巖齋絃誦夜] 만동묘(萬東廟)에서 제사지낼 제 연기가 피어 오르는구나[煙昇皇廟燎燔時] 황제의 어필이 영락하여 산골짝에 머물고 있으니[御書零落留山谷] 옛 대로(大老)께선 방황하며 평생을 슬퍼하셨어라[故老彷徨沒世悲]”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의 문인인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은 암서재에서 우암의 시에 차운했다. “대로가 장수(藏修: 학문을 닦아 게을리하지 않고, 쉬는 시간에도 학문에 마음을 두는 것)한 장소[大老藏修地] 시냇가 몇 칸의 집이라오[臨溪屋數間] 산굽이 지금 적막하니[巖阿今寂寞] 아득히 높은 자취 따르기 어렵네[高躅邈難攀]”

 

숙종15년(1689) 우암 83세 때, 수암에게 영결(永訣)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주문(朱門: 朱子學)의 전통을 계승하기를 부탁하며, 장남헌(張南軒)이 우제사(虞帝祠)를 세운 것과 초인(楚人)들이 소왕(昭王)을 제사한 고사에 따라 화양동(華陽洞) 절벽 아래에 한 칸의 사당(祠堂)을 세워 명(明) 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하라.” 이에 숙종30년(1704) 우암의 유명(遺命)을 받든 수암 등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신종과 의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화양동(華陽洞)에 세워 만동묘(萬東廟)라 이름하고 이어 향례(享禮)를 거행하였다.

 

수암의 문인인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는 우암의 묘지(墓誌)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한수(寒水) 권선생(權先生: 權尙夏)에게 들으니 기사년(숙종 15년, 1689)의 화가 일어나 선사(先師) 우암(尤菴)께서 사약을 받고 임종하실 때에 소자(小子)에게 말씀하시기를 ‘학문은 주자(朱子)를 위주로 하고 사업은 효종(孝宗)께서 하시려던 것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하셨다. <中略> 선생은 일찍이 화양동 수석(水石)의 아름다움을 좋아했으므로 여기에 서재를 짓고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아예 이곳으로 이주하였으니, 이는 회옹(晦翁: 朱子)이 무원(婺源: 雲谷精舍)에서 강학한 것을 따르려 한 것 이었다.<後略>”

 

속리산 국립공원을 흐르는 화양천 3㎞ 구간에 걸쳐 하류에 해당하는 제1곡부터 상류에 해당하는 제9곡까지의 경관을 화양구곡(華陽九曲)으로 화양동 소금강(小金剛)이라 한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