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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四字論語> ‘逝者如水’ 가는 것이 마치 물과 같구나

김용재
2018.10.14·4분 읽기·조회 29

 

김용재 / 성신여대 한문교육과 교수

 


 

공자께서 시냇가에 서계시면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도다!”(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인저 不舍晝夜로다 「子罕」 16)

 

공자가 어느 날 개울가에 서계시다가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는 것(逝)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고 흘러가고 또 흘러가니 …… ”

 

‘서(逝)’라는 것은 자전적으로 ‘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과거로의 사라져 버림(往)’을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가다’가 아니라 ‘과거로 지나가 버리고, 지금은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중국 한당대(漢唐代)의 경전 주석가들은 이 경문을 공자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흐르는 물(流水)처럼 빨리 지나쳐버려, 어느덧 여기에까지 오게 된 것에 대한 허망함을 드러낸 문장이라고 풀이하였다. 마치 공자가 물가에 우두커니 기대고 서 계시면서, 그간 살아온 인생의 덧없음과 허망함을 한탄하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경문에서의 ‘가는 것이 물과 같다(逝者如水)’는 것은 공자의 일생에 대한 단편적 애상(哀傷)과 애수(哀愁)로 치부하기에는 일면 너무 아까워 보인다. 인생에 대한 통찰과 자성은 누구나 한번쯤 내뱉을 수 있는 가십(gossip)꺼리 이기도 하다.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 이 경문을 다음과 같이 감상(感想)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반문해 본다.

 

공자는 늘상 산책을 하며 냇가를 거닐고 있었다. 언제나 똑같은 어제의 개울물이었음에도 유난히 오늘 산책을 나와서 보고 있는 이 개울물은 무엇인가 다른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항상 봐왔던 일상이 오늘따라 새로운 낯선 광경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 물속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 앞에 존재하고 있는 데도 알지 못했던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거나, 혹은 궁금증이 갈수록 증폭되는 기분은 실로 소름이 끼쳐 오르기에 충분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야장천(晝夜長川)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자연에 대한 호기심도 생길 수 있고, 자연의 원리와 법칙을 인간세계와 결부시키려는 새로운 철학을 탄생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한치의 어김없이 찾아오는 자연의 일정한 법칙을 인간이 본받아야만 한다는 통찰이었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치며 자연을 이용하고 변화시키려 하여도, 자연은 꿈쩍하지 않는다. 태풍과 지진같은 자연재해를 인간이 어찌 막을 수 있다는 것인가?

 

개미가 먹잇감을 입에 물고 떼지어 움직이는 장면을 보라. 그 개미들에겐 교통사고 한 번 일어나지 않는다. 개미와 같은 미세한 동물 앞에서도 인간은 극히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자연의 법칙이 가지고 있는 ‘자연율(自然律)’은 항상 그러한 것이다. 불변(不變)이며 항상(恒常)의 법칙이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듯이, 인간도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하며, 백성을 위하는 위민의식을 가져야 하고,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일정한 방향의 법칙을 견지해야만 한다. 이것이 곧 자연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저점이며, 이것이 곧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일 것이다.

 

‘평상(平常)’을 ‘비상(非常)’으로, 또 ‘평범(平凡)’을 ‘비범(非凡)’으로 바라볼 줄 아는 공자의 시선이야말로 성인(聖人)의 경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새로운 관찰을 통해 창조적 문제의식을 갖게 되고, 이 문제의식은 호기심을 유발시켜가며, 그 호기심은 곧 알고자 하는 지적(知的)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낯익은 것’을 낯설게 바라볼 줄 아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 ‘낯설었던 것’을 ‘낯익음’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의 ‘일상(日常)’이자 ‘평상(平常)’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