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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四字論語> ‘ 過勿憚改’ 허물이 있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마라

김용재
2018.11.11·4분 읽기·조회 38

 

김용재 / 성신여대 한문교육과 교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忠)과 신(信)을 위주로 하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벗 삼지 말고, 잘못이 있다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子曰 主忠信하며 毋友不如己者요 過則勿憚改니라. 「子罕」 24)

 

본래 이 경문은 󰡔논어󰡕에 2회 출현한다. 「학이」편 8번 문장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문장 앞에 “주충신(主忠信), 무우불여기자(無友不如己者)”를 잊어서는 안 된다. “충(忠)과 신(信)을 주로 행하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는 벗하지 말라”는 뜻이다.

 

‘충’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솔한 마음자세를 일컫는 한자이다. 흔히들 ‘충성’이라 풀이하여 타자에 대한 맹목적 복종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충’의 본연의 의미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충실하고 진솔한 양심을 뜻한다.

 

이러한 대자적(對自的) 마음이 타인에게 그대로 올곧게 반영되어 나타난 모습을 ‘믿음[信]’이라는 한자로 대신한다. 그러니까 ‘신’은 대타적(對他的) 자세를 일컫는 글자이다.

 

내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늘 ‘충신’으로 대하는데도 나와 같은 마음이 메아리로 다가오지 못하는 벗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친구를 사귀지 말라는 것이 공자의 따끔한 충고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어울려 살아감에는 최소한의 도리가 있어야 하며, 그것이 곧 ‘진솔함[忠]과 신뢰[信]’라는 것이다.

 

무려 2500여 년이 지난 현대사회에서도 이러한 양심과 신뢰라는 덕목의 유효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示唆)해 주는 것일까? 독자 여러분의 답신을 기대해 본다.

 

그런데 공자의 말씀이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로 이어진다는 점에 우리는 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허물이 있으면 곧 (그 잘못을) 고치는 것을 꺼려하지 마라!”는 명령문이다. ‘충신’스럽지 못한 벗에게 따끔한 충언을 해주는 것도 벗의 도리이고, 그러한 간언을 저버리지 않는 것 역시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다.

 

공자의 유가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점 하나가 ‘인간’ 중심의 세계라는 점이다. 무엇이나 다 알고 무엇이든 다 행할 수 있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神)의 존재를 절대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인간에 의해’ 교화될 수 있고, ‘인간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며, ‘인간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천선(遷善)해나가는 실증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절대적 신에게 인간의 주체적 삶을 모두 맡길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공자는 이러한 실존적인 인간의 모습에서 현세의 삶을 주체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교리를 찾고자 했던 것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래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그 숱한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삶의 지혜와 여유를 찾고자 했을지 모른다. 실수를 안 할 수 없지만, 그 과오를 용서하고 고쳐주는 것이 절대 ‘신’의 역할이 아니라는 점은 일존주의(一尊主義)의 유일신을 숭배하는 서양사상과 확연히 구분되는 대목이다.

 

서양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인간의 잘못을 고쳐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한 사람, 유일무이(唯一無二)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신(神:God)’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본래 허물을 저지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도 의미 있는 말씀이지만, 그러한 허물을 고쳐주려 노력하는 타자의 충언이야말로 또 의미 있는 언사이며, 타인으로부터 받은 충고에 따라 자신의 허물을 고치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인간이야말로 진정 부끄러움이 없는 참된 인간의 본모습일 것이다.

 

아마도 허물을 고치라고 충고해줌에도 자신의 잘못을 고치기를 꺼려하는 사람은 소인배(小人輩)들이 아닐까?

 

이 경문 앞에 ‘군자’의 위엄에 대해 설명하고 있음을 상기해 볼 때, 이 문장은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고자 하는 경계의 말씀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