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으로 보는 세상 174죽창과 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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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대유학당 대표)
전쟁을 하는 사괘는 바르게 함이니, 장인이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으리라.(사괘 괘사)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
동학의 농민군이 앉으면 손에 든 죽창만 보여서 대나무로 산을 이룬 것 같고, 일어서면 흰 옷을 입고 봉기했기 때문에 흰옷으로 산을 이룬 것 같다는 것이다. 1894년 정월, 전라도 고부 농민들이 조병갑 군수의 학정을 못이겨 봉기했고, 3월에 전봉준이 전북 고창에서 다시 봉기하자, 백산(전북 부안)에 모인 농민군이 8천을 넘었다. 그 농민군의 모습을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고 한 것이다.
4월, 농민군이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정부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점령하자,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5월 초 청나라군이 조선에 도착했고 일본도 톈진조약을 내세워 군대를 보냈다. 이러한 정황과 정부군의 대포공격으로 전주성의 농민군이 두려움에 떨자, 전봉준이 하늘의 뜻을 묻자고 하면서 점을 쳤다.
점친 결과 수천수괘 상효가 동하였다. 그 효사에 “편안한 구멍으로 들어간다. 초청하지 않은 손님 셋이 오리니, 공경하면 길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전봉준이 “3일을 기다리면 여러 동지들이 만족할 만한 방향으로 일이 풀릴 것이다. 동요하지 말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농민군이 3일을 동요 없이 버텼고, 그 사이에 전봉준은 홍계훈과 전주화약을 맺었다. 여기서 ‘초청하지 않은 손님 셋’은 청나라군과 일본군 그리고 정부군으로 볼 수 있다. 그들과 잘 협상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편안한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될 것이다.
전주화약을 맺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청나라와 일본이 간섭할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며 조선을 압박했고, 사회 개혁을 두려워한 양반층이 민보군을 조직해 농민군을 공격하자, 김개남이 남원에서 재봉기를 하였다. 전봉준도 남접의 농민군 10만과 손병희의 북접농민군 10만을 합하고자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히자, 하늘의 뜻에 따르자고 하면서 점을 쳐서 지수사괘 무동(無動)을 얻었다.
괘사에 “사는 바르게 함이니, 경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으리라”고 하였다. 사괘는 전쟁을 하는 괘이다. 전봉준은 ‘길하고 허물이 없으리라’를 보고 재봉기를 하였지만, 그 앞의 ‘경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야’라는 말을 간과하였다.
일본군의 숫자는 200여 명에 불과했지만,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데다 청나라 군대를 물리친 정예병이었다. 더구나 1000여 명의 정부군도 중화기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죽창으로 무장한 농민군이 정면으로 붙어서는 승산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리에 밝고 숫자가 많다는 장점을 살려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고 게릴라전을 펼치는 등 특수작전을 펼칠 생각을 않고 정면승부를 고집하였다. 결국 연속된 패전 끝에 우금치에서만 2만 명이 넘게 사살되었고, 자신도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래서 역에서는 “전쟁같이 참혹한 싸움은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련하고 경험 많은 사람이 지휘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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