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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우리지역 문화재를 소개합니다 - 34順天鄕校 金·黃 府使 興學碑

수령 재임 시 順天學風 조성에 큰 공 기려 

빅홍민 기자
2013.09.15·3분 읽기·조회 41

 

 

순천은 예로부터 교육의 도시로 정평이 난 곳인데, 이는 300년 전 부사를 역임한 김종일(金宗一, 1597∼1675), 황익재(黃翼再, 1682∼1747) 두 분의 숭고한 교육이념과 투철한 정신으로 튼튼한 기반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향교의 운영 주체는 그 지방의 수령이었기에 향교 교육의 활성화는 자연히 수령의 개별적인 행정능력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순천의 수령으로서 학문적 풍토를 조성하는데 공을 세운 이는 여러 사람이 있다. 특히 1647년(인조 25) 순천부사로 부임한 김종일 부사는 재임 3년 동안 순천의 학문 장려에 혼신을 다한 흔적이이 조현범이 쓴 강남악부(江南樂府) 승평지(昇平誌)와 비문음기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김부사는 진사 조시일(趙時一)에게 청하여 향교의 도훈장(導訓長)을 삼은 뒤 학생들의 근면함과 태만함을 살펴 상벌을 분명히 하니 그 교화가 크게 행하여졌으며 공자를 모신 사당이 퇴락한 것을 걱정하여 1649년(己丑, 효종 1) 계문(啓文)을 올려 윤허를 얻었으며 창의공 조원겸(趙元謙)은 교집(校執)의 임무를 부여 받고 집행하여 준공 후 공이 많은 공노비(公奴婢)는 속량(贖良)하여 주고 서책을 구비하여 보존시킨 것은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김부사는 매우 효성이 깊은 인물로 일찍부터 음주를 즐겼지만 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은 뒤로 술을 끊었으며 어머니가 병이 들어 찾는 수박을 구해드리지 못했음을 한탄하여 평생 수박을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그의 효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황익재 부사는 1716년(숙종 42) 35세의 나이로 부임하여 3년간 재임하면서 석현동 향림사(香林寺) 입구에 양사재(養士齋)를 창설하고 태인(泰仁)에 사는 오천(鰲川) 한백유(韓伯愈) 선생을 훈장으로 초빙하여 지역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힘을 쏟았으며 양사재 운영에 필요한 전답도 마련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722)과 계묘년(癸卯年, 1723)의 대흉년에 훈장 오천 선생은 삼순구식(3旬9食)을 하면서도 책읽기와 제자 지도에 소홀함이 없는 휼륭한 스승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후 1801년 금곡동 현재 위치로 향교를 옮기면서 양사재도 경내로 옮겼는데 1909년(융희 3)에는 수비대의 관사로 사용하다가 1911년에는 순천면사무소로 일시 사용되기도 했다.

흥학(興學)을 위해 힘쓴 이들 부사와 훈장들의 노고에 힘입어 순천학풍의 발상지가 된 순천향교 경내 은행나무 앞에는 3백 년 전 두 분 부사의 흥학비(興學碑)가 나란히 명륜당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