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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傳統 文化藝術의 香氣 ⑥社稷大祭, 萬民을 위한 祭禮

국민 결집을 위한 문화행사로 거듭나야

김우철 기자
2013.10.01·4분 읽기·조회 67

 

지난 9월15일 서울 종로구 소재 사직단에서 봉행된 2013 사직대제에서 태사(太社) 초헌관을 맡은

황사손(皇嗣孫) 이원(李源)씨가 음복례를 올리고 있다.

 

지난 9월15일 서울 사직단에서는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사직대제보존회가 주관하는 ‘2013 사직대제(社稷大祭)’가 봉행됐다. 이날 행사는 조선시대 임금이 탑승한 가마와 수행 행렬을 재현한 어가행렬(御駕行列)이 덕수궁 대한문 입구부터 사직단까지 진행된 것을 시작으로 영신례(迎神禮), 전폐례(奠幣禮), 천조례(薦俎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철변두(撤?豆), 송신례(送神禮), 망요례(望燎禮)의 순서로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각계 기관장들, 일반시민, 전주이씨종친 등 약 500여명이 참관한 이번 사직대제는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화하고 국태민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흔히 ‘社稷’이란 말은 국가나 조정(朝廷) 자체를 일컫기도 하지만 원래는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천(天)·지(地)·인(人) 중에서 땅[地]의 신을 기리는 제사 또는 그 제의장소를 말한다. ‘社’는 토지신을 뜻하는 것으로 사직단의 동쪽 제단이며, ‘稷’은 토지신의 기운을 간직한 곡신(穀神)을 뜻하며 서쪽 제단에 위치한다.

이 사직대제는 전통시대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국가적 차원으로 치러졌다. 농경을 근간으로 종법(宗法) 질서를 사회 시스템으로 삼은 전통 유교사회에서 땅[地]은 체제의 존재 근원이며 곡식은 사회 시스템의 기초인 백성을 유지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통치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직대제는 왕족 간의 단합을 목적으로 하는 종묘제례와 달리 왕족, 귀족, 백성, 이민족, 피지배층 등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만민(萬民) 행사의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의 각 현단위에서도 사직제를 봉행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결속을 다지고 신앙적 결집을 하게 하였다. 

고대 중국 주대(周代)에는 사직제를 봄·가을에 봉행하였다. 봄에는 파종 후 곡식의 무사성장을 빌고 가을에는 그 농작물의 성숙과 추수를 감사하는 것이었다. 이후 한나라 광무제 때에는 대사직(大社稷)을 낙양(洛陽)에 세우고 일 년에 2사(社) 1직(稷)을 제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나라 초기에는 매년 2월과 8월의 술일(戌日)에 대사와 대직을 제사 지냈다고 한다. 본격적인 사직 의례가 제정되어 시행된 시기는 명나라 1393년에 처음이며, 1421년에 북경에 사직단을 건립하여 매년 2월과 8월의 술일에 제전(祭典)을 행하였고 이후 청나라 때까지 그 전통의 명맥이 이어졌다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선덕왕(善德王)이 783년에 처음으로 사직단을 세웠으며, 그 뒤 고구려 고국양왕(故國壤王), 고려 성종(成宗), 조선 태조(太祖) 때 각각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었다. 이후 세종(世宗)이 1426년에 중국 당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사직단을 사직서(社稷署)로 승격시키고 직제를 확대 개편하였다. 그러나 1907년 일본은 우리 민중의 집결을 방해하고 국가적 정통성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사직단을 공원으로 만들어 사직공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1908년에는 급기야 제례의식까지 폐지하였다. 그 후 80여 년간 사직대제는 우리의 역사에서 지워져 있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정부와 민간의 협업이 이루어져 의례의 복원화 작업 실시되었다. 드디어 2010년도에 이르러 사직제례악과 일무(佾舞) 등의 원형 복원하여 지금까지 매년 9월 셋째 주 일요일에 봉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