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장 열전 ⑦불꽃처럼 살다. 여성의병장 尹熙順
선비의 딸로, 지사의 며느리로
항일의병 투쟁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여성의병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윤희순 선생은 선비 집안의 딸로 태어나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며,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이고 화서학파 제2대 종주인 성재 유중교의 종손인 유제원과 결혼한다. 선생은 보통 여성처럼 집에서 시아버지의 전승을 기원하고 있지만 않았다.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을 함께 도울 것을 요구하고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에게 의병활동을 촉구했다.
여성의병단 조직 항일운동
1907년 군대의 해산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후기 춘천의병에 참여했던 의병장의 부인, 고흥 유씨 집안의 여성들, 그리고 향촌 여성들 76명으로부터 군자금 355냥을 모집하고 가정리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하였다. 여성의병은 의병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 하는 등 의병훈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뿐만 아니라 직접 의병 훈련에도 참가했다.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제작하며 구국활동을 촉구하기도 했다. 많은 여성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도록 ‘안사람 의병가’, ‘안사람 의병노래’ 등을 지어 여성들도 구국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밀고자들을 힐책했으며 청년들에게는 구국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만주에서도 꺾이지 않은 독립 의지
선생은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아들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선생은 집안 남자들이 모두 의병운동을 하러 집을 떠나자 초근목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선생은 이웃마을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 항일선전을 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항일운동단체에 전달했다. 생계의 어려움 속에서도 항일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에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창립해 운영하고 남편이 죽고 학교마저 폐교되자 무순 포가둔으로 이주해 아들인 유돈상과 함께 조선독립단과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조직하고,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했다. 선생은 아들인 유돈상이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순국한 지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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