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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도심 속 옛 터 이야기 ⑧光海의 충신, 仁祖의 역적 朴承宗 집터

이홍익 기자
2013.11.01·2분 읽기·조회 27

 

 

 

남산공원으로 가는 길 초반 작은 골목에 주민들을 위해 지어 놓은 듯한 자그마한 근린공원안에 눈에 잘 띠지 않는 작은 표지석이 있다. 바람과 비에 글씨 마저 희미해진 이 표지석은 이 곳이 박승종(朴承宗)과 그의 장남인 박자흥(朴自興)의 생가터 임을 알려주고 있다.

쫓겨난 임금의 충신이 살던 집터 답게 그의 생가 표지석은 낡고 바랬으며 눈에 안띄는 곳에 꼭꼭 숨어있다. 광해군 시대에 대표적인 간신인 이이첨과 더불어 광해군 시대에 권력에 핵심 있던 그는 선조 말년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광해군이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광해를 지키고 결국은 유영경이 이끄는 소북을 무력으로 제압해 광해가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권력욕에 매몰된 간신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광해를 지키려 한 몇 안되는 충신이었다. 그는 광해가 인목대비의 폐모를 추진할 때 마치 앞날이라도 내다보듯 폐모에 반대하고 정치적 동료이자 맏아들의 장인이기도 한 이이첨으로부터 대비의 생명을 지켜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폐모가 언제든지 쿠데타의 명분이 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진심으로 그의 주군을 지키려는 충심이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해 그는 영의정이었고 60대에 나이였고 경기도 관찰사인 장남 박자흥은 40대 초반의 한창 나이였다. 그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박자흥이 군사를 동원해 반정을 저지하려는 하는 것을 막고 동반 자살을 택했다. 광해의 세자가 불과 20세의 나이로 귀양지를 탈출해 군사를 일으키려는 시도를 했고 광해가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복위를 꿈꾸었던 것에 비하면 그의 선택은 대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소극적인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추후에 그의 복작과 시호 수여로 긍정적인 평가 받았다. 적어도 죽음을 앞둔 순간 그의 선택은 의도 여부와는 관계없이 광해가 아닌 자신과 집안을 먼저 생각하는 속물 선비의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