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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손세제 박사의 논어이야기> 논어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 첫 번째 이야기-

손세제
2022.02.26·11분 읽기·조회 70

 

 

손세제(철학박사, 결성향교)

 


 

“높은 산은 올려다보고 먼 길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이르기는 어려워도 마음이 그곳을 향해 간다는 말입니다.

 

 

『사기』의 저자로 유명한 사마천(司馬遷)은 공자의 책을 읽고 그 사람됨을 보려고 직접 노나라에 갔다가, 공자의 고택에 보관된 공자의 수레와 의복, 예기(禮器) 등에 둘러싸여 예를 익히고 있는 제생(諸生)들을 보고, 감정이 북받쳐 올라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배회하기를 수차례 반복했다고 합니다.

 


나는 공자의 책을 읽고 그 사람됨을 생각해 보려고 하였다. 노나라에 갔을 때 중니(仲尼)의 묘당(廟堂)에 보관된 수레와 의복과 예기(禮器)를 보았는데 제생(諸生)들이 때때로 드나들며 예를 읽히고 있었다. 나는 다만 그곳에서 머뭇거리고 배회하면서 떠날 수가 없었다. 천하에는 생전(生前)에 영광을 누린 군주(君主)와 현인(賢人)들이 참으로 많았지만 죽으면 다 잊혀지고 말았을 뿐이다. 공자는 평민(平民)이었지만 대대로 학자들이 종가(宗家)처럼 받들었다. 천자(天子)ㆍ왕후(王后)로부터 모든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경륜하는 도에 대해 논할 때는 모두 공자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의지하였다.(『사기』 「공자세가」 태사공찬 – 내용은 의미에 맞게 통역함. 이하 같음)

 


 

돌다리도 두들겨 가며 건널 정도로 꼼꼼했다는 자하(子夏)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합니다. ‘어진이를 대할 때에는 정인(情人)을 대하듯 해라.’(「학이」 7: “賢賢易色”) 하루라도 못 보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정인(情人)과의 애틋한 정(情)을 나눠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자하(子夏)가 하신 말씀의 진의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대저 선비된 자는 ‘도가 있는 이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로잡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학이」 14: “就有道而正焉”) 그러나 그런 이를 만나기란 여간 어렵지 않겠지요. 그런데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던 분을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우연찮게 만났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나는 다만 그분 곁에서 머뭇거리고 배회하기를 수없이 하면서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혹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인류 역사에 이보다 더 거룩한 사람이 있을까? ‘성스러운 사람’ ‘성인’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닐까? 이것이 인류사를 통틀어 위대한 역사가로 꼽히는 사마천에 비친 공자의 자태입니다.

 

평민으로 태어나 죽어서 성인이 된 어느 한 위대한 인간의 이야기! 논어는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     *     *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분이십니까? 학생이십니까? 아니면 직장인이십니까? 여성이십니까 남성이십니까? 젊은 분이십니까 연세 지긋한 분이십니까? 아니면 중년이십니까? 하시는 일은 무엇이십니까? 혹 예전에 논어를 한 번이라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읽어보셨다면 어디까지 읽어보셨습니까? 『논어』를 읽고 난 뒤 감동을 받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어느 대목에서 감동을 받으셨습니까? 혹 서가에 꼿혀 있는 논어를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훑어보는 데 그친 적은 없으신지요? 제목만 들어보았을 뿐 내용은 살펴보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은 『논어』라는 책이 보통 사람의 눈높이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논어』라는 책이 원래 어려운 책이라서 그런 것이냐고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저의 좁은 소견이지만 이 세상에 『논어』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책도 아마 없을 겁니다. 다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 정확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지나치게 두루뭉술하고 감성적인 것들뿐이라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이해가 안 되고 또 동의하기도 어려운 내용들이라서, 읽을 만한 동기라든가 흥미 유발 요인이 없어서 그럴 것입니다.

 

 

 

‘맞는 말이요 옳은 말이긴 한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렇게 하다가는 굶어죽기 똑 알맞을 걸.’ ‘그거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읽는 것 아냐? 세상은 이미 변했는데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야.’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에는 아마 금과옥조였을거야. 그런데 지금은 좀 …….’

 


아마 여러분 다수는 이런 느낌이셨을 겁니다. 저 또한 『논어』를 처음 읽었을 때 그런 느낌이었으니까요.

 

제게 유학의 도를 가르친 선생님께서는 ‘성현의 말씀이니 토를 달지 말고 읽거라. 읽고 또 읽다 보면 언젠가 이치를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이다’고 하셨지만, 저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공자께서는 너 나이 때 학문에 뜻을 두시고, 서른 살이 되었을 때에는 입지를 다지셨고, 마흔 살이 되셨을 때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심지를 갖추셨다. 쉰 살이 되셨을 때에는 천명을 이해하셨고, 예순 살이 되셨을 때에는 어떤 말을 들어도 이치에 부합하는 것 같아서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일흔 살이 되셨을 때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도의에 어긋나거나 사람들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없으셨다. 그러니 너도 공자님을 본받아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고 성긴 네 행동을 잘 갈무리하도록 해라. 그리 하다 보면 언젠가 만인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어 있는 너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위정」 4)

 


이런 말씀을 하실 때는 선생님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제 약관을 조금 넘긴 제가 그분의 경지를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이십 년도 채 못 살아본 제가 서른 살, 마흔 살, 쉰 살의 경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니 예순 살, 일흔 살의 경지는 저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요.

 

그래서 선생님 앞에서는 열심히 하는 척하면서, 돌아서서는 ‘선생님께서는 세상물정을 잘 모르시는구나. 이미 세상은 변했는데 아직도 저런 말씀을 하시다니. 열심히 하라고 하시니 하긴 하겠지만, 나는 절대로 선생님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라 하면서 딴짓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매일의 가르침을 외우지 않으면 야단을 맞기 일쑤였기 때문에 『논어』의 문장을 외우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때는 강학(講學)이 수업의 일상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방과 후에 복습하여 제가 얻은 심득(心得)을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선생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는 학습법이었죠. 그 덕분인지 몰라도 지금의 제 머리속에는 그때 읽고 암송하던 『논어』의 문장들이 선생님 말씀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기는 합니다.

 


이천[程伊川] 선생은 논어를 읽고 난 뒤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논어』를 읽고 나서 다 읽은 뒤에 전혀 아무런 일이 없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두 구를 터득하고 기뻐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너무 즐거워)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로 뛰는 자도 있다.” 그리고 그 내면적 이해의 깊이에 응해서 논어가 얼마나 맛이 깊은 책인지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셨다. “나는 나이 17~8세 때부터 『논어』를 읽었는데, 당시에도 이미 글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읽기를 더욱 오래함에 다만 의미가 심장함을 느꼈다.” 너 또한 나이 오십이 되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序說」)

 


그리고 이 말씀은 제게 영원한 숙제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깨달아야 할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죠. 이제 시간이 흘러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긴 즈음에, 선생님 말씀을 되새기며 『논어』를 다시 읽으니, ‘과연 선생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선생님은 이미 오래 전에 가셨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조금의 틀림도 없이 제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논어』에 쓰여 있는 글이 이렇게 진실되고 아름다운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지금에 와서 선생님의 말씀이 제 가슴을 시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도깨비 방망이로 물씬 두들겨 맞아도 이런 걸 느끼기는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니었나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 진한 감동을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저는 선생님처럼 『논어』에 대해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말씀드릴 겁니다.

 

예를 들면,

 


논어는 어떤 책인가?

 

논어가 20편으로 이루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각 편의 문장들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져서 각 편에 수록되었는가?

 

논어라는 책이 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언제인가?

 

논어는 처음 제작된 후 어떤 변환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

 

전통 사회에서 논어는 어떻게 이해되고 수용되었나?

 

논어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읽어야 논어의 가르침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오늘날의 사회에서 논어는 어떤 가치와 존재 의의를 지니고 있는가?

 

불교나 도교 혹은 기독교나 서구에서 들어온 사상과 논어는 어떤 점에서 다르고,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인가?

 

논어의 가르침을 실생활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까?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을 중심으로 『논어』의 가치와 존재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야기는 『논어』를 읽을 때마다 품게 되는 의문들을 문제 혹은 주제별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당연히 글 속에서는 공자의 일생이든가 공문 제자들의 언행, 공자와 공문 사우들 간의 대화, 전통 및 습속에 대한 공문의 견해, 공자 몰후(歿後)의 유학의 전개 등등이 다뤄지게 될 것입니다. 유학에서 말하는 정치와 경제, 종교와 신앙, 학문과 사상, 역사와 문화, 도덕과 윤리, 산업, 인간, 세계에 대한 이해는 덤으로 논해질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지면이 허락된다면 육경(六經)의 성립이라든가 주소학(註疏學)의 의의, 『효경(孝經)』 및 오경(五經)의 세계, 또 불교의 화엄학(華嚴學) 및 선학(禪學)과 대비되는 주자학의 위대한 자태, 스콜라적 사유와 주자학적 사유의 비교, 유학의 근대성 문제, 현대사회에서의 유교의 가치 및 그 선양 방안 등등에 대해서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유학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의 소개가 아니라 유학사 전체에 흐르는 유교의 정신과 내적 논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읽다가 지치면 덮어 버리게 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흥미진진하게 써 보겠습니다. 다시 읽지 않아도 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중요한 것은 반복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잠시의 짬을 내어 읽어도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을 얻으실 수 있도록 써 보겠습니다. 힘들여 읽지 않아도 의미가 마음에 와닿도록 써 보겠습니다. 그래서 유교의 선양 및 향교의 중흥에 이바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는 영광이요 여한이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