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27인자(仁者)와 지자(智者)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金水亭

영평팔경 중 으뜸으로 이름난 금수정(金水亭)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수려한 풍광으로 예로부터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사암(思庵) 박순(朴淳),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등이 이곳에 와서 영평천의 흰모래와 물 위에 솟은 바위 등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했다.

금수정 편액은 봉래의 글을 탁본보필(拓本補筆)한 것이다.

물속 바위에 봉래가 초서로 쓴 증금옹시(贈琴翁詩) 경도(瓊島) 준암(尊岩)이 있고, 석봉(石峯) 한호(韓濩) 해서로 쓴 동천석문(洞天石門)과 금수정(金水亭) 글이 새겨져 있다.
포천(抱川)은 고구려 마홀(馬忽)로 일명 명지(命旨)라고도 했다. 신라 때 견성군(堅城郡)이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포주(抱州)라 불렀다. 조선 태종 13년에 현감을 두었고,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승격하여 영평현(永平縣)과 포천군이 하나로 합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쪽에 동두천(東豆川), 동쪽에 가평(加平), 북쪽에 연천(漣川)과 철원(鐵原)이 있다. 고을 동쪽에 운악산(雲岳山)과 현등산(縣燈山), 서쪽에 해룡산(海龍山)과 왕방산(王方山), 남쪽에 항적산(香積山)과 무둔산(無芚山), 북쪽에 보장산(寶藏山)이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인데, 고을 남쪽 축석현(祝石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수원산에서 나와 합류하여 영평천(永平川)을 이루어 한탄강으로 흘러간다.
포천향교 북쪽 50여리 창수면 오가리에 영평팔경(永平八景)의 하나인 수려한 풍광으로 이름 난 금수정(金水亭)이 있다. 정축년(丁丑, 1997) 포천향교 류봉현(柳鳳鉉) 전교(典校)의 재건기문(再建記文)에 “예로부터 영평팔경이라 칭함이 있었으니 화적연(禾積淵), 금수정(金水亭), 창옥병(蒼玉屛), 와룡암(臥龍巖), 백로주(白鷺洲), 청학동(靑鶴洞), 선유담(仙遊潭), 낙귀정(樂歸亭)이 이것이다. 이 금수정은 팔경 중 으뜸가는 승경(勝景)이다. 이 정자를 만든 이는 누구인가? 문헌에 전함이 없지만, 당초 기문과 상량문, 중수기문이 정자에 게재(揭載)되어 있었으나 6.25동란으로 인해 정자가 소실되어 고증(考證)할 수 없었다. 영평군지(永平郡誌), 근처에 있는 안동김씨세천비음기(安東金氏世阡碑陰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사암집(思菴集), 봉래시집(蓬萊詩集), 번암집(樊巖集) 등 금수정과 관련된 글을 추심(推尋)했다”라고 적혀 있다. 재건기문에 “고려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이곳에서 노닐었는데[逍遙] 지형이 소의 머리와 흡사하다하여 우두(牛頭)라고 불렀다. 척약재의 차자(次子)인 성천도호부사(成川都護府副使) 김명리(金明理)가 탄곡(炭谷)에 은둔할 때 처음 이 정자를 지어 우두정(牛頭亭)이라고 했다”라며 정자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의 아들인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는 금수정시서(金水亭詩序)에서 ‘물이 돌아 흘러 모여 못[潭]을 이루고, 그 위에 새가 날개를 펼친 듯 정자가 있으니 바로 금수정이다’고 했다. 풍수가[堪輿家]들이 그 언덕위의 지형이 소머리와 흡사하다하여 일명 우두정이라고 불렀다[水滙而爲潭 有亭翼然其上 爲金水亭 堪輿家以其上地形如牛頭 又名牛頭亭]‘라고 했다. 또한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백운계기(白雲溪記)에 “백로주(白鷺洲)를 보고 저녁에 백운계(白雲溪)에 이르렀는데 영평 고을 서쪽으로 5리쯤에 있다. 물은 느리고 모래는 평평하며 암벽은 더욱 가팔랐다. 깊은 못과 긴 여울이 위아래로 아득하였고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과 눈이 녹아 있었다. 물새 수십 마리가 울면서 날아갔다. 계곡의 반석(磐石)에 완상(玩賞) 할 만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과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석각(石刻) 글씨가 있으며 못가에 옛날 안동 김확(金矱)이 복축(卜築)한 금수정이 있다”라고 기록했다.
지금은 소실되었지만, 번안(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금수정중수기문(金水亭重修記)에 “금수정은 김씨(金氏)의 소유가 된 것이 여러 백년이 되었다. 김씨들은 여기에 묘를 쓰고, 여기에 전원으로 삼았다.[亭爲金氏有且累百年矣 金氏丘墓於斯 田園於斯] 나아가서는 조정에 의용(儀容)을 갖추어 벼슬을 하고, 집에 있어서는 은거할 곳을 굳게 지켰다.[出則羽儀王廷 處則牢守菟裘] 냇물과 폭포로 울타리를 삼고 바위와 뫼로 베개와 자리를 삼았다.[以川瀑爲樊籬 巖巒爲枕席] 경성 둘레 수 백리 안에 정자로 이름 난 것으로 감히 금수정과 동렬에 둘 만한 것이 없으니, 아마도 하늘이 신령한 곳을 마련하여 김씨 집에 이바지 한 것이리라.[環京城數百里內亭以名者 無敢與所謂金水者齒 葢天設靈區以餉金氏者也]”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경기도 관찰사로써 이곳에 와서 지나다가 정자에 올라와 봉래와 석봉의 필적을 어루만지고 벽에 걸려 있는 동주의 시문과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의 상량문을 읽고 배회(徘徊)하다가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다.[余嘗以道伯 迂廵節以入登亭而觴 臨水而席 拊楊士彦韓景洪筆蹟 讀壁間李東州詩文及希菴先生上樑文 徘徊瞻眺 不知山日之夕也]라고 기록했고, 후손 김택인(金宅仁)이 번암에게 중수 기문을 요청했다고 했다.
정자 아래 흐르는 영평천 가운데에 솟아 있는 많은 바위들을 연화암(蓮花岩)이라 하며 새겨진 글자를 볼 수 있다. 특히 척약재의 5대손인 금옹(琴翁) 김윤복(金胤福)의 사위인 봉래의 글이 많다. 봉래가 금옹에게 주었다는 “녹기금은 백아의 마음이니[緣綺琴伯牙心] 종자기가 바로 지음(知音)이로다[鍾子是知音] 한 번 타고 또 다시 한 번 읊노라니[一鼓復一吟] 바람없이 일어나는 소리는 먼 봉우리서 일어나고[虛籟起遙岑] 강에 비친 달은 곱고 강물은 깊고 깊네[江月涓涓江水深]”의 시가 초서로 암각되어 있다.
척재(惕齋) 이서구(李書九)는 “나그네 정자에 올라와 경치를 구경하니[客子登臨分物色] 속세를 떠난 주인은 그대로 풍류로다[主人高臥自風流] 봉래 신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蓬萊仙侶今安在] 그가 쓴 초서만이 돌 위에 남아 있네[惟見銀鉤石上留]”라며 정자의 풍광과 봉래가 남긴 암각을 노래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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