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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30관동(關東) 제일의 으뜸 누각 望洋亭

편집부
2017.03.30·7분 읽기·조회 15

망양정

 

망양정 편액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은 울진군 기성면 망양동에 건립되었으나 이전(移轉)과 중수(重修)를 거듭하여 철종 11년(1860) 현재의 위치인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에 이건(移建)되었다. 풍화로 인해 허물어져 1958년 중건하고 2005년 해체 복원했다. 왕피천(王避川)이 동해로 흘러가며 울창한 송림(松林)과 은빛 모래가 펼쳐진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는 망양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빼어난 승경(勝景)으로 이름나 수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 와서 시를 남겼다. 숙종 16년(1690)에 왕이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편액을 하사했다.

 

평해(平海)는 고구려 때 근을어(斤乙於), 고려 초기에 평해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다. 현종(顯宗) 때에 예주(禮州: 寧海)에 소속시키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렬왕(忠烈王) 때 군(郡)으로 승격되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하였다. 평해군은 울진군(蔚珍郡)과 통합되어 지금의 울진군(蔚珍郡)이 되었다.

동남쪽은 바다에 의지하고 서북쪽은 산을 등진 형승으로, 북쪽에 삼척(三陟), 서쪽에 봉화(奉化)와 영양(英陽), 남쪽에 영덕(盈德)과 인접해 있다. 고을 서쪽에 백암산(白巖山)이 솟아 있고, 남대천(南大川)이 백암산 남쪽 기슭에서 나와 고을 동남쪽을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평해에는 관동팔경(關東八景)으로 이름난 월송정(越松亭)과 망양정(望洋亭)이 있다.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에 위치한 망양정은 고을 북쪽 40여 리 해안에 있다. 나재(懶齋) 채수(蔡壽)의 기문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 정자는 여덟 기둥으로 둘렀는데 기와는 옛 것을 쓰고, 재목도 새로운 것을 쓰지 않았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못하지만, 풍경 물색의 기이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中略> 바람 자고 물결 고요하며 구름 걷고 비 갤 때에, 눈을 들어 한 번 바라보면 동쪽이 동쪽이 아니요, 남쪽이 남쪽이 아닌데 신기루(蜃氣樓)가 보일락 말락 하고, 바위섬들은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가다가 큰 물결이 거세게 부딪치고, 고래가 물을 내뿜으면 은은하고도 시끄러운 소리에 하늘이 부딪치고 땅이 터지는 것 같으며, 흰 수레가 바람 속을 달리고 은산(銀山)이 언덕에 부서지는 것 같다.”

또한 기문에 “우리나라에서 봉래(蓬萊)와 영주(瀛洲)를 산수의 고장이라 하지만 그중에도 관동(關東) 지방이 제일이 되며, 관동 지방의 누대(樓臺)가 수없이 많지만 이 정자가 제일 으뜸이 된다”라고 기록했다.

고려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며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교유한 원재(圓齋) 정추(鄭樞)는 “망양정 위에 한참 동안 서 있으니[望洋亭上立多時] 늦은 봄이 가을 같아서 마음 더욱 아득해지네[春晚如秋意轉悲] 아무래도 바다 가운데 바람과 안개 나쁜 모양이지[知是海中風霧惡] 전나무와 소나무 동쪽 향한 가지는 자라지 못했네[杉松不長向東枝] 일만 골짜기 일천 바위가 잇따라 놓였는데[萬壑千巖邐迤開] 산을 따라 돌아가고 산을 따라 왔다네[傍山歸去傍山來] 구름이 큰 물결에서 나니 하늘을 다 감쌌고[雲生巨浸包天盡] 바람은 놀란 물결을 보내어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風送驚濤打岸回]”라는 시를 읊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정자에 올라 달을 바라보며 “십 리 모래밭에서 큰 바다를 바라보니[十里沙平望大洋] 멀고 넓은 바다 위 하늘에 달이 떠오르네[海天遙闊月蒼蒼] 신선들 세계라 인간 세상과는 막혀 있고[蓬山正與塵衰隔] 사람들은 물 위에 뜬 한 잎 마름 잎과 이웃하네[人在浮菱一葉傍]”라고 이곳의 풍광을 노래했다.

예로부터 평해 지역에 기성팔경(箕城八景)이 있으니,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고시(古詩)를 지어 승경(勝景)을 노래한 후 많은 명공문사(名公文士)들이 이를 차운(次韻)하였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는 “바다를 낀 높은 정자 전망이 탁 트여[枕海危亭望眼通] 올라가 보면 가슴 속이 후련히 씻기네[登臨猶足盪心胸] 긴 바람이 황혼의 달을 불어 올리면[長風吹上黃昏月] 달 속 궁궐이 옥거울 속에 영롱하다네[金闕玲瓏玉鏡中]”라고 읊었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영동(嶺東) 아홉 고을은 모두 바다에 잇닿아 있으나, 평해(平海)의 망양정은 몇 리 바다로 들어간 지점에 있다. 뛰어난 시로서는 오정(梧亭) 박란(朴蘭)의 시를 절창(絶唱)으로 삼는다”라고 했다. 오정은 강릉의 교수(敎授)로 있을 때 “나는 듯한 정자의 뛰어난 경치가 우리나라의 으뜸이라[飛亭勝絶冠吾邦] 고개 밖 누대들 모두 머리를 조아리네[嶺外樓臺盡乞降] 양곡(暘谷: 해 돋는 곳)에 치미는 물결은 솟는 해를 떠받쳐 올리고[暘谷浪飜掀出日] 고깃배 돛에 심한 바람이 불어오니 휘청거리는 돛대만 앙상하구나[漁帆風急露危杠] 누가 앞으로 낚시질을 배워서 자라를 여섯씩 한 줄에 꿸꼬[誰將學釣鼇連六] 나는 신선을 따르고자 신을 한꺼번에 둘씩 들어보네[我欲追仙寫擧雙] 천년토록 뛰어난 시인들이 수곽에 부끄럽게 여긴 까닭은[千古雄才慙水郭] 바다와 강을 아우른 장관을 읊기 어렵기 때문이라네[壯觀難賦海兼江]”라고 차운했다.

정자에 숙종(肅宗)과 정조(正祖)의 어제시(御製詩)가 있다. 숙종은 “여러 골짜기 겹겹이 구불구불 열리고[列壑重重逶迤開] 놀란 파도 큰 물결은 하늘에 닿아 있네[驚濤巨浪接天來] 지금 이 바다를 술로 만들 수 있다면[如今此海變成酒] 어찌 한갓 삼백 잔만 마실 수 있으리오[奚但只傾三百盃]”라고 노래했다. 또한 정조는 “일기가 창망할 때 바닷가로 나오니[元氣蒼茫放海溟] 뉘라서 이곳에 망양정을 알 수 있으리[誰人辨此望洋亭] 흡사 공부자의 집 구경하듯이[恰如縱目宣尼宅] 종묘며 관청 담들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구나[宗廟官墻歷歷經]”라는 시를 남겼다.

간이(簡易) 최립(崔岦)은 “바다를 향해 열린 정자 경치가 모두 이 한눈에[向海開亭納納歸] 정자는 항상 있건마는 멋진 시객(詩客)은 드무네[好亭常有到人稀] 그대가 지은 칠언 절구 등림(登臨: 정자 위에서 바다 경치를 감상함)의 구절을 읊다 보니[吟君七字登臨句] 약수(弱水: 인간 세상과 신선 세계를 격리시키고 있다는 전설 속의 물 이름)의 동풍이 불어와서 나의 옷깃을 휘날리네[弱水東風吹我衣]”라고 노래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이곳에 와서 “텬근(天根)을 못내 보와 망양뎡((望洋亭)의 올은 말이[하늘 끝을 못 보아 망양정에 올라서 읊조린 말은] 바다 밧근 하날이니 하날 밧근 무서신고[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갓득 노한 고래 뉘라셔 놀내 관대[가뜩이나 노한 고래 누가 놀라게 했길래] 블거니 쁨거니 어즈러이 구난디고[고래가 물을 부는 듯 뿜는 듯 어지럽게 구는구나]”라고 노래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