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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항일의병장 열전不世出의 평민의병장 신돌석

이홍익 기자
2014.03.15·2분 읽기·조회 39

누(樓)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 / 낙목이 가로놓인 조국을 탄식하네 /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 문뜩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1905년 선생이 평해 월송정에 올라 읊은 시-

신돌석 장군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19세의 젊은 나이로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상북도 영해(寧海)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의병 100명을 모아 영릉의병장(寧陵義兵長)의 이름으로 출발하였다(1906). 4월에는 울진 장흥관에서 일본군선 9척을 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에서 일본군들을 습격했다.

1907년에는 울진 수동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증모했고, 그 병력으로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했다.

또한 일본군이 청송에 집결해 있을 때 이를 공격하기 위해 의병을 가까운 청부역으로 진군시켰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주민들이 의병에 자원해 휘하 의병이 3,000여 명을 넘을 정도로 세를 떨쳤다.

장군의 세가 커진 것을 보고 일본군이 영양의 주곡(注谷)으로 퇴각하자 이를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당시 일본군은 선생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장군은 다음 해인 1907년 전국의 의병이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양주(陽州)에 집결하자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여 의병 1,000여 명을 모아 참여했다.

선생의 명성은 영남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전국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평민의 처지였지만 선생은 이 해 11월 전국 의병이 연합부대로 13도창의군을 결성할 때,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교남창의대장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선생의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저지와 방해로 합류하지는 못하고 영남일대에서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전국 의병연합은 작전 계획과 지도력의 미흡으로 서울 공격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해산됐다.

장군은 1908년 10월까지 활약한 후 겨울이 되자 의병들을 귀가시킨 후 눌곡(訥谷)에 있는 부하 의병인 김상열(金相烈)의 집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이들 형제들이 모의로 살해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