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

<四字論語> ‘繪事後素’ 그림 그리는 일은 하얀 비단을 준비한 뒤에 한다

편집부
2017.04.29·3분 읽기·조회 34

최영갑 / 성균관대 겸임교수

자하가 물었다. “‘예쁘게 웃는 보조개여, 아름다운 눈동자의 흑백이 선명하도다. 하얀 비단으로 채색을 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림 그리는 일은 하얀 비단보다 뒤에 하는 것이다.” 자하가 말했다. “그러면 예가 뒤가 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일깨우는 자는 상이로구나. 비로소 시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겠구나.(子夏問曰 巧笑倩兮며 美目盼兮여 素以爲絢兮라하니 何謂也잇고. 子曰 繪事後素니라. 曰 禮後乎인저. 子曰 起予者는 商也로다. 始可與言詩已矣로다. 「팔일」8)”

벽에 걸린 흑백의 단순한 그림을 본다. 하얀 것은 화선지요 검은 것은 먹물일 뿐이다. 겨우 두 가지 색으로 그린 그림이 지루하지 않다. 이것이 동양화의 맛이다. 이처럼 그림은 하얀 종이에 그리는 것이 좋다. 흰 바탕이 채색을 가장 잘 받기 때문이다.

인생도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아름답고 선한 마음 위에 채색을 해야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 수 있다. 지저분하게 채색된 종이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듯이 마음이 아름답지 못하면 아무리 꾸며도 위선밖에 되지 않는다.

2010년 새로 제작한 광화문 현판이 갈라졌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복원된 지 불과 3개월 만에 다시 균열이 생긴 것이다. 처음부터 충분히 건조된 목재를 사용했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첫 바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일이다.

공자가 살았던 당시 사회는 지나치게 예(禮)라는 형식을 중시했다. 하지만 공자는 예를 행하는 것은 훌륭한 인간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성이 없으면 아무리 예의를 잘 지켜도 소용없고, 아무리 음악을 잘 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았다. 어른은 젊은 사람을 보살피고, 젊은 사람은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전통으로 계승되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해 지식 교육에 치중한 나머지 예의를 가르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다보니 무례한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이 무례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교육은 어리면 어릴수록 좋다고 한다. 어린 아이들 마음에 어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을 것인가 생각하며 교육을 시켜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은 사라지고 유치원에서부터 영어교육에 치중하고 있다. 부모는 직장에 다니느라 바쁘고 아이들은 학원으로 내몰리고 있다.

예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과장된 예도 예가 아니다. 그래서 과공비례(過恭非禮)라고 한다. 예를 중시하는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거기에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흰 바탕에 그림을 그려보자. 아름답고 고상한 그림을 그려보자. 바탕이 없는 사람들이 겉으로 꾸미는 것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개인적 이익과 나쁜 마음으로 유림계를 혼란시키면서 마치 유교를 위하는 것처럼 꾸며대는 사람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