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31춘하추동(春夏秋冬) 아름다운 풍광이 투영된 映碧亭


남주명향(南州名鄕) 능주. 관영리에 위치한 영벽정은 사시사철 연주산과 지석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수 차례 중수를 거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누각으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벽정 편액은 능주 목사 한치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와 풍광을 노래했다.
선비의 지조(志操)와 충절(忠節) 고을로 이름난 화순(和順)은 전라남도 중앙에 위치한 고을로, 조선시대 능주목(綾州牧)과 화순현(和順縣) 그리고 동복현(同福縣)이 합쳐진 고을이다. 화순읍에 화순향교(和順鄕校), 능주면에 능주향교(綾州鄕校), 동복면에 동복향교(同福鄕校)가 이 지역 교육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능주(綾州)는 백제 때 이릉부리군(尒陵夫里郡), 죽수부리(竹樹夫里), 인부리(仁夫里)라고 칭했다가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 인종 21년(1143)에 현령을 두었고, 조선 태종 16년(1416)에 화순현을 합쳐서 순성현(順城縣)으로 고쳤다가 다시 각각 복구시켰다. 인조 10년(1632)에는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 추존왕 원종의 정비)의 고향이라고 하여 능주목으로 승격되었다.
고을 동쪽에 연주산(聯珠山)이 펼쳐져 있고, 지석천(砥石川)이 고을을 감싸 흐르고 있다. 능주향교 서쪽 능주면 관영리에 연주산의 모습이 지석천에 투영되는 승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이름난 정자가 있으니 바로 영벽정(映碧亭)이다. 정자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등의 시로 미루어 15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증한다. 예로부터 영벽정에서 봄을 즐기는 것[(映碧賞春)과 연주산의 나뭇꾼 피리소리[珠山樵笛] 등은 능주팔경(綾州八景)으로 이름났다.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연원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학문을 계승하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등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점필재 김종직은 객관(客館) 동쪽에 있는 봉서루(鳳棲樓)에 올라 시를 읊었다. “연주산 위에는 달이 쟁반같이 둥그런데[連珠山上月如盤] 초목엔 바람 없고 이슬 기운만 차갑구나[草樹無風露氣寒] 일천 진의 상서 구름은 다 걷히려 하고[千陣瑞雲渾欲盡] 한 무더기 공문서는 의당 볼 것도 없네[一堆鈴牒不須看] 시절은 다시 아름다운 중추임을 알겠는데[年華更覺中秋勝] 손의 회포는 누가 이 밤에 위로될 줄 알았으랴[客況誰知此夜寬] 나그네 깃발은 또 서해를 따라 옮겨 갈텐데[旌旆又遵西海轉] 손가락 끝으로 둥근 게 농짝을 쪼개는 구나[指尖將擘蟹臍團]”
학포 양팽손은 이곳 쌍봉리(雙峯里)에서 태어났다. 한훤당의 제자인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제자가 되어 도학(道學) 지지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개혁을 추진했으나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당시 학포의 나이 32세로, 소두(疏頭)가 되어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의 신원(伸寃)에 앞장섰다. 하지만 수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했으며, 학포 또한 관직이 삭탈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스승인 정암이 이곳으로 적려(謫廬)되자 날마다 스승을 찾았으며,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곁을 지켰다. “태평이란 옛부터 어찌 형태가 없을 소냐[太平從古豈無形] 백리길 뽕나무와 삼을 가꾸니 후손들 편안하다네[百里桑麻子弟寧] 바라보니 푸른 봉우리가 성곽을 이었으니[擡眼碧峯當縣郭] 그대로 하여금 참으로 이 강에 정자를 남겼구나[令君眞有此江亭]”라는 학포의 시가 정자에 걸려 있다.
인조 10년(1632) 능주 목사(牧使) 정연(鄭沇)이 개수(改修)하고, 고종 때 화재로 소실된 정자를 목사 한치조(韓致肇)가 중건(重建)했다.
정자를 중수 한 후 한치조는 “산수가 아름다워 붉은 난간 더욱 좋고[山光水色動朱欄] 옛것을 다시 새롭게 꾸며 뒷날에 빛내고자 했네[舊制重新耀後觀] 오늘에서야 낙성을 알리니 하늘의 도움이 있고[今日告成應有數] 지난날 화재는 뜻밖의 일이었네[向來回祿太無端] 공무와 여가에 손님과 함께 오르기 좋고[公餘携客登臨好] 농사짓는 틈틈이 병사 조련하기 넉넉하리라[農隙調兵進退寬] 이제 객관 동쪽에 있는 봉서루(鳳棲樓)와 마주보게 되었으니[却與鳳棲樓共峙] 항주의 풍광인가 모두가 반기네[杭州眉目使人歡]”라고 노래했다.
화순군 춘양면 출신으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은 “산수는 붉은 비단이라 그림 그리기 어려워[紅綾山水畵難形] 백성들은 부유하고 물산은 풍요롭고 마을은 편안하네[民富物豐百里寧] 남쪽 고을의 훌륭한 경치를 어디에서 찾아볼까[南州勝狀看何處] 서석산 돌아오는 길에 이 정자 있었구나[瑞石歸路又此亭]”라고 노래했다.
능주 쌍봉리 출신인 만희재(晩羲齋) 양진영(梁進永)은 철종 10년(1860) 72세 때 증광(增廣)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한 만학도였다. 만희재는 “흰 물새 날아오니 흰빛이 비치는 영백정이요[白鷗飛映白亭] 붉은 여뀌 붉게 피어나니 붉은 빛이 비치는 영홍정이요[紅蓼發映紅亭] 흰 물새 날아가고 붉은 여뀌 떨어지니 푸른 빛 비치는 영벽정이네[白鷗去紅蓼落映碧亭]”라고 읊었다.
능주군주사(綾州郡主事)를 역임한 주기풍(朱基豊)은 영벽정중수기(映碧亭重修記)에서 “정자가 비바람에 깎이고 벌레와 쥐로 인해 서까래와 처마가 무너져 누수가 심해 각 가문에 재물을 모아 수리하고 보수하였으니, 기미년(己未年: 1919) 10월부터 다음해 경신년(庚申年:1920) 4월까지 비로소 작업을 마쳤다”다고 기록했다. 또한 중수기문에 “송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제주태수(滁州太守)로 있을 때 지은 취옹정(醉翁亭)은 강호의 흥취가 적고[滁亭少江湖之興] 동정호(洞庭湖)를 조망할 수 있는 호남성(湖南省) 악양루(岳陽樓)는 산림의 정취가 부족하다[岳樓欠山林之趣]”라며 “영벽정은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하여 산림과 강호의 뛰어난 경관을 겸했다”라며 영벽정의 승경을 칭송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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