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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33學士樓. 학이 공중에 날면 학사가 시를 읊조릴 듯하네

편집부
2017.06.14·7분 읽기·조회 28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에 위치한 학사루는 고운 최치원이 이곳 태수로 부임하여 자주 누각에 올랐다고 한다. 왜란 때 소실되어 숙종18년(1692) 중건하고 1979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지붕의 누각으로 현재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함양(咸陽)은 속함(速含), 함성(含城), 천령(天嶺), 허주(許州) 등으로 불렸는데 신라 때 속함군(速含郡), 경덕왕(景德王) 때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成宗) 때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되었다. 그 후 조선 태조 4년(1395)에 군으로 승격했고 영조 5년(1729)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풍속이 근신하고 정성스러움을 숭상한다”라고 했다. 고을 북쪽에 백암산(白巖山)과 문필봉(文筆峯)이 있고, 남쪽에 지리산(智異山)과 오도봉(悟道峯)이 있다. 또한 서쪽에 백운산(白雲山), 동쪽에 수지봉(愁智峯)이 있다.

거창, 산청, 남원, 하동, 장수 등과 인접하여 예로부터 이곳은 경상좌도(慶尙左道)의 안동(安東)과 함께 경상우도(慶尙右道) 학문의 중심지였다.

함양향교 남쪽에 유서 깊은 누각이 있으니 학사루(學士樓)이다. 학사루는 객관 서편에 있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천령 태수로 있으면서 올랐던 연유로 학사루라 이름했다. 그 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에 누각 또한 옮겨다 지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함양군학사루기(咸陽郡學士樓記)에 누각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함양군의 관청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백 걸음 남짓 떨어진 성벽 가에 몇 칸짜리 누각이 하나 있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퇴락되어 서까래가 삭아 부러지고 단청은 새까맣게 되었다. 갑인년(정조18년, 1794)에 윤광석(尹光碩) 군수가 녹봉을 털어서 대대적인 수리 공사를 일으켜 누각의 옛 모습을 복구하고 옛 이름을 그대로 써서 ‘학사루(學士樓)’라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부탁하여 글월을 엮어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다. 함양은 신라 시대에 천령군(天嶺郡)으로 불렸는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은 자(字)가 고운(孤雲)으로 일찍이 천령의 수령이 되어 이 누각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미 천 년이 지난 것이다. 천령의 백성들은 문창후가 끼친 은혜를 생각하여 지금도 그 누각을 학사루라 부르고 있으니, 이는 그가 이곳을 거쳐 갔음을 들어서 기념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운은 나이 12세에 상선(商船)을 따라 당 나라에 들어갔다. 나이 18세 때 희종(僖宗) 건부(乾符)1년(874)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이 주관한 과거에 급제하고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고, 승진하여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高騈)의 종사순관(從事巡官)이 되었는데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書)를 보냈으니 고운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성종2년(1471)에 함양군수로 부임했다. 학사루 아래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시를 지어 지기(知己)인 뇌계(㵢谿) 유호인(兪好仁)과 화답했다. “학사루 앞에 홀로 서 있는 신선이여[學士樓前獨立仙] 서로 만나 한번 웃으니 예전 그대로라네[相逢一笑故依然] 견여 타고 지나려다 다시 잡고 위로하노니[肩輿欲過還攀慰] 금년엔 봄바람이 너무도 거세게 부는구나[今歲春風太劇顚] 춘곤에다 병까지 겹쳐 청명을 지내노니[春慵和疾過淸明] 벼슬살이 조용하여 잠 이루기도 쉽네[官況愔愔睡易成] 매화 곁에 가서 읊다 그윽한 흥치 일어나자[吟到梅邊幽興動] 이서들이 다투어 서로 사군이 깨었다고 말하네[吏胥爭道使君醒]

옥계(玉溪) 노진(盧禛)은 “산과 물로 둘러싸인 하나의 별천지[山水縈廻別一天] 이곳에 누대 있어 신선이 노니는 듯[樓居此地怳遊仙] 촌에 이어진 대숲의 서늘한 기운 자리에 스며들고[村連碧篠涼侵席] 연무 자욱한 긴 숲의 그림자 연석에 잠기누나[煙暝長林影蘸筵] 점필재의 풍류도 벌써 백년의 해를 넘기고[佔畢風流年過百] 고운의 묵은 자취 천년이 되어 가는구나[孤雲陳迹歲垂千] 인간 세상 부앙하며 공연히 배회하였나니[人間俯仰空延佇] 난간에 기대어 읊조리던 소년 시절 생각나네[嘯詠欄楯憶少年]”라고 노래했다.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은 “두류산은 만 길도 넘게 우뚝 솟아 있고[頭流山聳萬丈餘] 학사루 앞에는 대나무 그늘이 듬성하네[學士樓前竹影疎] 온 종일 송사하는 곳은 물처럼 맑으리니[盡日訟庭淸似水] 시 읊다 파하자마자 또 곧 책을 보겠지[吟詩纔罷又看書]”라고 노래했다.

숙종37년(1711)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도의 산천과 풍속을 기록했다. “신라의 큰 고을 속함성[新羅劇郡速含城] 산세는 험하고 물은 감돌아 흐르네[山勢崚嶒水勢縈] 학사루 근처에서 고적을 찾고[ 學士樓邊尋古蹟] 용유담 가에서 진세의 갓끈 씻노라[龍遊潭上濯塵纓]”

누각 기둥에 다음과 같은 주련(柱聯)이 있다. “칠월의 매미소리 누각에 가득한데[七月蟬聲滿一樓] 누각에 올라 회고하니 감회가 깊구나[登臨回顧叉傷秋] 상하림 긴 숲에 성은 높이 솟았고[長林上下高城出] 넓은 들 동남에 두 냇물이 흐르네[大野東南二水流] 학사는 이미 황학을 타고 가버렸는데[學士已乘黃鶴去] 행인은 부질없이 흰구름만 바라보네[行人空見白雲留] 가련타 풍물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可憐風物今猶昔] 언제나 추녀 끝에는 시편이 걸려 있네[常有詩篇揭軒頭]”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점필재는 몸가짐이 단정 성실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며, 문장이 고고(高古)하여 당대 유종(儒宗)이 되었다.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전후(前後)의 명사들이 많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中略> 유자광(柳子光)이 함양에 노닐면서 시를 지어 새겨 누각에 붙이게 하였는데, 점필재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말하기를, ‘자광이 어떤 작자인데 감히 현판을 한단 말이냐’하고 떼어서 불사르게 하였다.”

연산군(燕山君)4년(1498)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점필재를 비롯하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등 수많은 제자들이 연좌의 화를 당했다. 일두의 증손인 춘수당(春睡堂) 정수민(鄭秀民)은 “아! 슬프다. 무오사화의 일[嗚呼戊午年間事] 푸른 하늘에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데[欲向蒼天問厥由] 하늘에 오를 수 없어 호소하기 어려우니[天不可階難可訴] 눈물이 울분 따라 옷깃 가득 적시네[涕隨遺憤滿衿流]”라는 시를 남겼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