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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34以威亭. 인의(仁義)와 충용(忠勇)으로써 천하에 위엄을 떨치네

편집부
2017.06.30·7분 읽기·조회 32

 

이위정(以威亭)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위치한 행궁 후원에 있는 정자로 순조 16년(1816)에 남한산성 수어사 심상규(沈象奎)가 창건하고 기문을 썼으며 추사 김정희가 해서로 썼다. 남한산성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백제 온조왕의 위패를 모신 숭렬전(崇烈殿), 삼학사 등의 충절을 기리는 현절사(顯節祠) 등이 있다. 특히 남한산성은 2014년 6월에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광주(廣州)는 본래 백제의 고도(古都)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한산주(漢山州)로 고쳤고 그후 경덕왕(景德王) 15년에는 한주(漢州)라 고쳤다. 고려 성종(成宗) 2년(983)에 전국을 12목(牧)으로 삼았을 때 광주라고 이름하고 목사(牧使)를 파견했다. 조선시대에도 목사를 두었으며, 인조(仁祖) 원년(1623)에 유수(留守)로 승격하고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4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고 관청을 성안으로 옮겼고, 인조 15년(1637)에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고쳤다. 예로부터 한주(漢州), 회안(淮安) 등으로 불러졌다.

조선시대 광주는 상당히 큰 영역을 자랑했다. 동쪽으로는 양근군(楊根郡)과 여주목(驪州牧)과 인접하고, 남쪽으로 이천부(利川府)와 양지현(陽智縣) 및 용인현(龍仁縣)까지, 서쪽으로는 과천현(果川縣)과 양재역(良才驛) 및 안산군(安山郡)과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양주목(楊州牧) 경계에 이르렀다. 현재 하남시, 성남시, 수원시와 인접하고 있다.

한수(漢水: 한강)의 남쪽 지역으로 토양이 기름졌다. 또한 수서(隋書)에 의하면, “백제의 풍속이 말을 타고 활 쏘기를 숭상하며, 서사(書史)를 읽어 행정의 일에 능하다”라고 했다. “사문(斯文)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천년에 드리우니, 착하고 좋은 풍속이 응당 한 고을에서 많이 나오리라”라며 우곡(愚谷) 정이오(鄭二吾)는 이 고을을 노래했다. 광주향교(廣州鄕校) 남쪽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동아시아의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로 평가 받아 지난 2014년도에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알려진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남한산성기(南漢山城記)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남한산성은 경성(京城) 동남쪽 40리(里) 지점 한수(漢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광주의 옛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5리(里)가 약간 더 되는 거리에 있다. 이곳은 본디 백제(百濟)의 옛 도읍지였다. <中略> 기보(畿輔) 근처에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의논들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이에 수상(首相) 이원익(李元翼)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건의하여 이 산성의 수리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처음에 청원군(靑原君) 심기원(沈器遠)에게 그 일을 관장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가 놀고 먹는 인원들을 공사에 투입하려고 하면서 도첩(度帖)을 이용해 승도(僧徒)들을 포섭하다가 곧이어 상사(喪事)를 당해 그만두고 말았다. 이에 총융사(摠戎使)인 완풍부원군(完豐府院君) 이서(李曙)가 그 임무를 대신 맡고는 바로 명승(名僧)인 각성(覺性)과 응성(應聖) 등을 널리 불러들여 각자 그 승도들을 총섭(摠攝)하게 한 뒤 지역별로 나눠 공사를 분담케 하였다는데, 이때 목사(牧使) 문희성(文希聖)과 별장(別將) 이일원(李一元)과 비장(裨將) 이광춘(李光春) 등이 실제로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산성의 사방 주위로 기지(基址)가 완연한 곳은 대개 온조왕이 옛날에 쌓았던 곳이다. 바로 이를 기초로 그 위에 증축하면서 평탄하고 험난한 지형을 참작하여 고저(高低)의 높이를 맞추어 나갔는데, 인조 2년(1624) 9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인조 4년(1626) 7월에 완공했다.”

행궁(行宮) 좌승당(坐勝堂) 뒤쪽에 이위정(以威亭)이 있으니, ‘병자호란 후 180년 지난 순조 16년(1816)에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가 기문을 짓고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썼다[歲三周丙子之閏月靑松沈象奎記月城金正喜書]’라고 적혀 있다. 이 글은 추사가 중국에 다녀 온 후 31세 때 해서체로 쓴 글이다. 기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심상규가 남한산성의 수어사(守禦使)가 되어 이미 행궁 북편에 당과 누각을 만들었고, 또한 누각 서편에 정자를 짓고 ‘이위(以威)’라고 이름하니 빈좌(賓佐)와 군교(軍校)가 활을 쏘는 장소이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활[弧]과 화살[矢]의 이로움으로써 천하를 위엄케 한다’고 했으니, 성인이 상(象)을 하늘에서 보고 법(法)을 땅에서 관찰하여 지혜로써 사물을 창조하시니 그 호시(弧矢)가 있지 아니할 때를 당하여 문득 만드시니, 그 날짐승과 들짐승의 무리가 하루 아침에 나무의 굽은 것과 깎은 것으로 쏜다면 반드시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서로 거느리고 따르게 되니 이 또한 천하를 위엄할만한 것이다.”

또한 기문에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활을 쏘는 것은 단지 활과 화살뿐만이 아니라, 이 일은 깊이 힘써 이 성의 사람들이 날마다 인의(仁義)와 충용(忠勇)의 길을 흥기하기를 크게 바라노니 오니 어찌 끝내 천하를 위엄하지 못하겠는가?”라고 적혀 있다.

실록에 의하면, 인조 14년(1636) 12월 14일(甲申) 청나라 오랑캐가 침범하자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했다. 한 후자 성 안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척화(斥和)와 화친(和親)의 논의 속에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과 이조참판 정온(鄭蘊)을 비롯한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三學士) 등이 화친의 부당함을 간언(諫言)했다. 하지만 항전 한지 47만에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당한 후 창경궁 나아갔다.

남한산성 행궁(行宮)은 종묘와 사직단을 갖추고 있으니 유사시 이어(移御)하여 임시수도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행궁 터에 ‘영조와 정조(正祖)가 영능(寧陵)에 전배(展拜)하고 돌아가는 길에 머물렀다 갔다’라고 새겨져 있다. 행궁 외삼문에 해당하는 한남루(漢南樓)는 정조 22년(1798) 유수(留守) 홍억(洪檍)에 의해 세워졌다. 주련(柱聯)에 “성을 지키려면 용호도를 익혀야 하며[守一城講龍虎韜] 백리를 진압할 수 있는 용맹한 선비를 모아야 하네[鎭百里閱豼貅士] 훌륭한 관리는 임금의 은덕을 널리 퍼뜨리고[良刺史宣上恩德] 대장군은 임금의 아래에서 위신을 펼치다[大將軍御下威信]”라고 적혀 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