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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35愛閑亭. 청명(淸明)으로 자적(自適)하는 한가로움

편집부
2017.07.15·7분 읽기·조회 37

 

 

 

 

애한정(愛閑亭)은 괴산군 괴산읍 검승리에 위치한 정자로, 광해군 6년(1614) 박지겸(朴知謙)이 낙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達川)은 괴산 고을을 지나 충주(忠州)로 흘러 남한강과 합류되는데, 괴탄(槐灘) 혹은 괴강(槐江)이라고 한다. 애한정에 오르는 길에 있는 함양박씨정효각(咸陽朴氏旌孝閣)은 애한정의 9대손인 박상진(朴商鎭)의 정려(旌閭)이다. 부친을 위해 단지(斷指)를 하여 고종 28년(1891)에 정려되었다. 정효각 안에 “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朴商鎭之門”이란 편액이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뒤쪽 담장 안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를 원애한정(原愛閑亭)이라고 부른다. 위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건립된 애한정은 1979년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괴산(槐山)은 충청북도에 있는 고을로, 소백산맥(小白山脈)이 동남쪽에 뻗어 있다. 북으로는 충주, 음성, 동으로는 제천, 경북 문경, 남으로는 경북 상주, 보은, 서로는 청원, 진천과 인접한다. 고구려 때 잉근내군(仍斤內郡),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괴양군(槐壤郡)으로 고쳐 한주(漢州: 지금의 廣州)에 속했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서 괴주(槐州)로 고쳤다가 현종(顯宗) 9년(1018)에 충주(忠州)에 속한 후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 태종(太宗) 3년(1403)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하고, 13년에 괴산군으로 명명했다.

 

괴양(槐壤) 혹은 시안(始安)으로 불렸던 괴산은 괴산향교, 연풍향교, 청안향교가 있어 지방 교육의 중심지였다. 현재 괴산군과 연풍현(延豐縣), 청안현(淸安縣)이 합쳐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달천(達川)이 고을을 감싸 흐르는 괴산향교 동쪽에 이름난 정자가 있으니 애한정(愛閑亭)이다. 조선조 4대 문장가로 이름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다음과 같이 기문(記文)을 남겼다. “괴탄(槐灘)의 상류는 땅이 외지고 아름다워 푸른 벼랑과 맑은 물, 높은 소나무와 긴 대나무의 빼어난 경치가 있다. 나의 노우(老友) 박익경(朴益卿)이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정자 이름을 ‘애한(愛閑)’이라 하고 사대부들에게 그 기문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월사가 말한 노우(老友)는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임금을 의주(義州)까지 호가(扈駕)하여 별검(別檢)에 오른 애한정(愛閑亭) 박지겸(朴知謙)이다. 광해군 6년(1614) 때 이곳에 낙향하여 정자를 지어 후진양성에 노력했다. 기문에 의하면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이 맨 먼저 문(文)과 시(詩)를 지어 이 정자의 이름을 ‘한한(閑閑)’이라 했으니, 그 뜻은 대개 ‘나 스스로 한가로워야 하는 것[蓋以吾自閑之]’이다”라고 했다.

 

오봉은 정자의 이름을 ‘한한(閑閑)’으로 권했으나 월사는 ‘애한(愛閑)’으로 할 것을 기문에 적고 있다. “아침에는 해 뜨는 것에서 한가롭고 저녁이면 달 뜨는 것에서 한가로우며, 봄에는 꽃을 보며 한가롭고 겨울에는 눈을 보며 한가로우며, 거문고를 타면서 그 흥취를 사랑하고 낚시를 드리운 채 그 자적(自適)을 사랑하며, 다닐 때는 시를 읊고 누워서는 책을 보며,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조망하고 물가에 다다라 노니는 물고기를 구경하는 등 어떠한 경우이건 모두 한가로우니, 사랑한다[愛]는 것으로써 정자 이름을 짓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사랑해 마지않아 마침내 스스로 자기가 한가로운 줄 모르는 경지에 이르면 ‘한한(閑閑)’의 뜻 또한 그 가운데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진실로 한가로움과 내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라 하겠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기문에 “고(故) 별검(別檢) 박공(朴公)이 경영한 애한정은 괴산에 있으니 오봉(五峯)과 월사(月沙) 등의 글과 시가 있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니 괴산의 오랜 명소였으나 세월이 흘러 쇠퇴하고 무너졌다”라고 적었다. 또한 기문에 “그 손자 박정준(朴廷俊)이 매양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는[肯堂]는 뜻을 지녔으나 집안이 가난하고 힘이 미약하여 오랫동안 일을 이루지 못했다. 계축년(현종 14년, 1673)에 군수 황세구(黃世耇)가 그의 효성스러운 뜻을 위해 마침내 급료를 쪼개어 일을 이루었다”라고 기록하여 애한정의 변천을 알 수 있다.

 

기문 말미에 “별검공의 휘(諱)는 지겸(知謙)이니 관향이 함양으로 대대로 우리나라의 명문 가문이다”라고 적혀 있고, 또한 “숭정(崇禎) 알봉(閼逢) 섭제격(攝提格) 맹하일(孟夏日)에 은진(津宋) 송시열(宋時烈)이 기록하다”라고 적혀 있으니, 알봉(閼逢)은 갑(甲)에 해당하고 섭제격(攝提格)은 인(寅)에 해당하므로 현종 15년(1674)에 해당된다.

 

우암의 후손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은 중수기문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애한정은 박씨의 소유가 되어 거의 3백년이 지나 여러 번 중수를 했으나 쇠락하고 무너지게 되었다. 을미년(乙未: 고종 32년,1895) 여름에 건물을 새로 수리했다. 박씨는 조상의 뜻과 사업 계승[繼述]을 잘한 가문으로 박씨의 계술(繼述)의 잘함을 볼진대, 별검(朴知謙)의 맑은 덕과 높은 품격을 상상할 수 있다. 애한정으로 편액한 뜻은 사물의 승경을 잘 드러낸 것이다. 오봉(李好閔)과 월사(李廷龜)의 글과 시가 이미 갖춰져 있고, 또한 나의 선조인 문정공(文正公: 宋時烈)의 이창기(移刱記)가 있으니 어찌 불녕(不佞)의 말이 번거롭지 않겠는가. 그러나 박씨가 선조의 유업을 계승한 일은 다만 어진 선조의 은둔한 뜻을 위함일 따름이니 선조의 뜻과 일을 궁구하지 않음이 옳겠는가.”

 

월사는 이곳에 온 적이 없지만 애한당을 위해 팔영(八詠)을 지었다. “여울 아래는 깊은 물이요 물 아래는 다리[灘下深潭潭下梁] 수면에 바람이 불 제 낚싯줄 길게 드리우네[水風吹面釣絲長] 푸른 도롱이 입고 비 맞으며 저녁에 돌아와[靑蓑帶雨歸來晩] 스스로 솔잎과 솔뿌리로 술을 빚어 손님에게 맛 보라 권하네[自醱松醪勸客嘗]”라는 시는 괴탄에서 낚시하는[槐灘釣魚] 풍광을 노래했다.

 

애한정은 소요당(逍遙堂) 세무(世茂)의 손자로 천자문과 함께 초학자들이 먼저 학습하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동몽선습은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임을 밝히며 차례로 오륜의 도리를 소개하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약술했다. 우암은 『동몽선습』 발문(跋文)에서 “소요당은 명종 때의 명신(名臣)으로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고 문로(文路) 또한 매우 바르니 이 책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라고 기록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