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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항일의병장 열전조국을 지킨 참 군인 의병장 閔肯鎬 장군

이홍익 기자
2014.06.02·3분 읽기·조회 25

위기에 처했을 때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는 법이다. 관동의병장 민긍호 장군은 일제 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당당히 조국을 지키고자 일어난 대한제국의 진정한 군인이었다.

그는 일제의 군대해산령을 거부하고 치열하게 투쟁한다.

장군은 1897년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의 정교(正校)로 무관생활을 시작한다. 뒤에 춘천분견대에 전입, 1901년 특무정교가 되고 원주진위대에 전입되었다.

1907년 8월 일제가 원주수비대를 해산하려 하자 장군은 단연히 봉기한다.

그는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 3시간 동안 격전하였다.

그 뒤 의병부대를 소단위의 의병부대로 재편성하여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쳐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장군은 이강년의 부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활동했다.

일제는 3개 소대를 파견해 장군의 부대와 교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07년 8월에 여주를 기습하여 경무분견소를 포위, 공격하여 일본경찰과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접수하였다.

이 승리가 널리 알려지자 많은 이가 지원해 부대의 병력이 수천명이나 되었다.

장군은 대규모 부대를 지휘해 여주 일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는 이강년 장군과 함께 충주를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장호원으로 후퇴하였다.

그 후 이천 북방과 산지동에서도 격전을 벌였다.

홍천을 습격하여 적에게 피해를 크게 입히기도 했으며 낭천군아를 기습 공격, 총기와 탄약을 접수하기도 했다.

춘천 남방의 정족 부근과 횡성군 봉복사에서도 큰 성과를 거둔다.

이후에도 횡성둔촌(屯村)에서 홍천 서남 양덕원에서 원주 동북 작곡)에서 계속 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1908년 2월 29일 일본군과 접전했을 때, 의병 20여 명이 사살되고 그는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벌인 시기는 2년여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 장군의 의병부대는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부대였다.

강원도·충청도·경상도로 전전하면서 모두 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