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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37觀魚臺. 노니는 물고기 보며 도체(道體)가 밝게 드러나 이치는 한결 같네

편집부
2017.08.15·8분 읽기·조회 21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상대산 정상에 위치한 관어대(觀魚臺)에 올라서면 영해(寧海)와 병곡평원[柄谷坪]을 품은 고래불 명사이십리가 눈썹 같은 푸른 솔에 기대어 울진 후포까지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등운(騰雲) 칠보산(七寶山) 읍령(泣嶺)이 병풍처럼 펼쳐있고, 남쪽으로는 포항 장기의 호미곳이 손에 잡힐 듯 보이며, 동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창해(蒼海)가 한 눈에 보이는 승지(勝地)이다. 예로부터 일출로 이름났다.

 


 

영해(寧海)는 고구려 때 우시군(于尸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유린(有隣)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예주(禮州)로 고쳤으며, 현종(顯宗)은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고종(高宗) 때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승격했다가 다시 예주목(禮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진(鎭)을 두고 병마사(兵馬使)가 부사(府使)를 겸임하게 하였으며, 태종(太宗) 13년(1413) 도호부(都護府)로 삼았다. 태종 15년(1415) 영덕현(盈德縣)을 관할하여 동해안을 침범하는 왜적을 막는 중추 역할을 맡았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 때 영해부(寧海府)와 영덕현이 군(郡)으로 되었다가 1914년 영해군이 영덕군에 폐합되었다. 영해부 복평리(福坪里: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 도곡동) 출신인 신돌석(申乭石) 의병장(義兵將)이 구국항일운동을 펼친 곳이다. 고을의 별칭으로 예주(禮州), 단양(丹陽), 덕원(德原)으로 부른다.

 

영덕군은 동쪽으로 동해, 서쪽으로 영양군과 청송군, 남쪽으로 포항시, 북쪽으로 울진군과 인접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산이 막히고 바다에 임했으니, 산은 멀고 첩첩하며 바다는 넓고 평평하다”라고 고을의 형상을 표현했다. 영해향교(寧海鄕校) 북동쪽 7리 쯤 위치한 영해면 괴시리 상대산(上臺山) 정상에 유서 깊은 정자가 있으니 관어대(觀魚臺)이다.

 

고려의 문신 근재(謹齋) 안축(安軸)이 충숙왕(忠肅王) 17년(1330) 5월에 강원도 존무사(存撫使)가 되어 울진 기성(箕城)에서 읊은 ‘단양(영해의 별호) 북루의 시에 제하여 부치다[寄題丹陽北樓詩]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남쪽에 관어대가 있으니 내가 20년 전에 놀던 곳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 찾아갈 겨를이 없어서 누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는 머뭇거리며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이 고을의 어떤 선생이 나에게 시를 남기라고 권하였으나, 이미 그 요청을 받고도 바빠서 미처 지을 겨를이 없었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났으나 하루도 이 누대를 잊은 적이 없다. 이제 6월에 또 기성에 이르러 다시 이 누대에 오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고 장구사운시(長句四韻詩: 칠언율시)를 지어 부친다.”

 

을미년(乙未年, 2015) 누각 복원을 마친 후 게시한 관어대기(觀魚臺記)에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뻗은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동해에 잠시 머물러 등운(騰雲) 칠보산(七寶山)을 일으키고 축산(丑山) 경산(鯨山)의 척추(脊椎)를 두드려 영덕인의 의기를 충천(衝天)시킨 후, 그 기세를 북으로 뻗어 상대산을 높여 그 머리에 관어대를 터 잡아 영해의 해문(海門)으로 삼고 이십리 고래불[鯨野]에 은빛 모래로 백두와 태백의 정수(精髓)를 깨쳤다. <中略> 영해의 발전이 영덕의 영광이자 나라의 홍복(洪福)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본군(本郡)이 어대(魚臺) 마을, 상대산의 옛 관어대를 지나 그 정상에 새로운 관어대 정(亭)을 창건한 이유이다.”

 

고려의 문신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유람(遊覽)으로 영해에 왔다가 김택(金澤)의 사위가 되었다. 가정의 아들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은 관어대부(觀魚臺賦)를 지었는데, 서(序)에, “관어대는 영해부(寧海府)에 있다. 동해의 바위 아래에 서 있어서 노는 물고기를 셀 수 있기에 관어대라고 이름했다. 영해부는 나의 외가이다. 그래서 작은 부(賦)를 지었으니 혹시 중원(中原)에 전하여지기를 바란다”라고 적혀 있다. 아마도 당시 목은의 아버지가 중원에 있었기에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했던 것 같다. 부에 “단양(丹陽) 동쪽 해안[丹陽東岸] 일본 서편 물가에는[日本西涯] 큰 물결이 아득하여[洪濤淼淼] 딴 것을 볼수 없네[莫知其他] 움직이면 태산이 무너지는 듯[其動也如山之頹 고요하면 거울을 갈아 놓은 듯[其靜也如鏡之磨] <中略> 그것을 굽어보는 대있으니[有臺俯焉] 눈 아래 땅이 없네[目中無地] 위에는 한 하늘[上有一天] 아래에는 한 물[下有一水] 망망한 그 사이[茫茫其閒] 천리인가 만리인가[千里萬里] 대 밑에는 물결이 잔잔하여[惟臺之下波伏不起] 뭇 고기들이 모이는데[俯見群魚] 같은 놈 다른 놈들[有同有異] 어릿어릿대고 꼬리치네[圉圉洋洋]”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은 ‘목은의 부를 읽고 관어대에 올라 경관의 뛰어나기가 동한(東韓)의 제일’이며, ‘선생(先生)의 남긴 뜻을 발양(發揚)’하기 위해 후관어대부(後觀魚臺賦)를 지었다. “<中略> 각자의 형상 각자의 빛을 지니고[自形自色] 스스로 울고 스스로 달리고[自鳴自走] 스스로 날고 스스로 뛰는 놈이[自飛自躍者] 어느 것이 물 아닌 게 있으리오[何莫非物也] 오직 어약(魚躍) 두 글자를[唯魚躍二字] 시경(詩經)에서 읊조렸는데[詠於雅章] 자사자(子思子)가 이를 취해 도(道)의 쓰임이 광대함으로 삼았고[子思子取之爲道之費] 이천(伊川)은 이를 논하여 생동감이 넘친다고 했으니[伊川論之爲活潑潑地] 도체의 밝게 드러난 걸 형용함에 있어[蓋形容道體之昭著] 이 말보다 더 지극한 게 없기 때문이네[莫斯言之爲至] 한산자(韓山子: 목은)가 부를 지어 그 뜻을 나타내면서[韓山子著賦以見其志] 중원에 전해지길 바란다고 한 것은[其曰傳之中原者] 역시 도를 전하길 스스로 기대함이었네[亦必以傳道而自冀爾] 그렇다면 물고기를 보는 즐거움은[然則觀魚之樂] 바로 옛 사람이 즐거워한 것이요[乃古人之樂] 나 홀로 즐거워한 것이 아니로다[非予之所獨也]”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36세 때 순변사(巡邊使)의 막부(幕府)에 평사(評事)로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가 모반을 일으키자 절도사의 관문(關文)을 가지고 군사를 모집하기 위해 영해부(寧海府)에 갔다. 군사를 다 모집하기 전에 가정(稼亭)의 구가(舊家)를 방문하고 관어대를 찾아 부를 남겼다. “<中略> 길이 휘파람 불며 내려다보니[劃長嘯以俯窺兮] 뭇 고기들 발랄하게 즐거워하누나[群魚撥剌以悅志] 아! 무리들끼리 장난하고 헤엄침이여[蹇族戲而隊游兮] 약간씩 출몰하는 것과는 비교할 바 아니로다[匪膚寸瀺灂之可擬] <中略> 솔개 나는 것과 아울러 비유를 취했으니[竝鳶飛以取譬兮] 그 누가 지극한 이치에 의혹을 가지리오[孰聽瑩於至理] 이는 태극의 진리가 앞에 나타남이니[斯太極之參于前兮] 맹세코 깊이 간직해서 버리지 않으리라[矢佩服而勿棄] <中略>”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괴당(槐堂) 이천계(李天啓) 시에 차운하여 “바닷가에 신선들이 산다는 말 듣고[聞道群仙海上居] 관어대에 기대어서 안타깝게 바라보네[含情悵望倚觀魚] 아득한 삼신산은 연무로 어둑하고[三洲縹緲迷煙霧] 끝이 없는 바다는 하늘과 닿았어라[萬頃蒼茫蘸碧虛] 한가롭게 황학 타고 노닐어 보려다가[擬遊汗漫乘黃鶴] 가파른 고개 향해 지친 나귀 재촉하네[轉向巉巖策困驢] 하늘 동쪽 돌아보니 생각이 한량없어[回首天東無盡意] 석양에 말 멈추고 다시 서성거리네[斜陽駐馬更班如]”라는 시를 남겼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