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42太古亭. 검소(儉素)하고 겸양(謙讓)으로 백성들을 다스려 격양가(擊壤歌) 읊조리네

편집부
2017.11.29·8분 읽기·조회 29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에 있는 태고정은 본래 용담면 옥거리 노송(老松) 숲 사이 주자천변 절벽 위에 있었으나 용담댐 건설로 이건되었다. 조선 현종 때 현령 홍석(洪錫)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을 짓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기문을 썼다. 편액은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친필이다. 정자에 용강추월(龍崗秋月: 용강산에 걸린 가을달), 태고청풍(太古淸風: 태고정에 부는 맑은 바람), 응봉락조(鷹峰落照: 응봉에 깃드는 저녁 노을), 송림수학(松林垂鶴: 송림에 드리운 학의 자태), 소요낙안(逍遙落雁: 소요대에 날아드는 기러기 떼), 옥천모종(玉泉暮鐘: 옥천암의 저녁 종소리), 삼천서원(三川書院: 삼천 서원의 풍광), 성남귀범(城南歸帆: 성남 마을로 돌아오는 돛단배) 등을 노래한 용담팔경(龍潭八景)이 있다.

 

용담(龍潭)은 백제 때 물거현(勿居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청거(淸渠)로 고쳤다가 고려 충선왕(忠宣王) 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령을 두었다. 용담은 진안(鎭安)과 합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용담 고을의 동남쪽 두 물이 서로 모이는 곳에 용담(龍潭)이 있어 고을의 이름으로 취했다. 동쪽으로 무주(茂朱)와 장수(長水), 남쪽으로 임실(任實), 서쪽으로 완주, 서쪽으로 완주(完州)와 전주(全州), 북쪽으로 금산(錦山)과 인접해 있다. 소백산맥(小白山脈)과 노령산맥(蘆嶺山脈)이 형성한 진안고원이 펼쳐져 있다. 고을의 별칭으로 옥천(玉川), 청거(淸渠)로 불렀다.

예로부터 “용담 고을의 백성들은 소박하고 사치함을 숭상하지 않았으며, 땅은 궁벽하고 하늘은 깊으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오래되었다. 폭이 좁은 곳에 맑은 물이 여러 겹 푸른 절벽에서 흐른다“라고 하여 산고수장(山高水長)으로 이름났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현령 최자비(崔自卑)가 중건한 용담향교(龍潭鄕校) 북서쪽 안천(顔川) 정천(程川) 주천(朱川)이 흘러 용담호(龍潭湖)의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에 이름난 정자가 있으니 바로 태고정(太古亭)이다. 원래 태고정은 용담면사무소에서 주천방향 약400m 지점에 와룡리로 접어드는 도로 왼쪽에 노송(老松) 숲 사이 주자천변 절벽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절벽 위에 기품 있고 멋들어지게 서 있었으나, 용담댐 건설로 이건 되어 현재 망향의 동산으로 옮겨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봉우리가 빼어나고 시내가 둘러 있으며, 송백(松柏)이 울창하다”라며 태고정의 풍광을 소개했다. 고을의 북쪽 64보 지점에 산봉우리가 우뚝하고 계류(溪流)가 둘려 있고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있는 곳에 현령 조정(趙鼎)이 작은 정자를 짓고 이름을 이요정(二樂亭)라 하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용담태고정기(龍潭太古亭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 했다. “만송정(萬松亭)은 용담 관아(官衙) 서편에 있었는데 푸른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섰으나, 잡초가 우거져서 좋은 경치가 묻혀 버렸다. 갑진년(현종 5, 1664)에 홍석(洪錫)이 현령으로 부임하여 고을 정사를 다스리고 난 여가에 이곳에 올라 구경하며 즐거워하다가 잡초를 불태우고 길을 소통시킨 뒤에 먼저 집 한 채를 짓고 온돌방을 꾸몄다. 남쪽은 와선(臥仙), 북쪽은 이은(吏隱)이라 하고, 또 이은 북쪽에 작은 툇마루를 꾸며서 주홀(拄笏)이라 하였으니, 이는 모두 현령이 이름 한 것이었다.”

기문에 의하면 공사가 끝나자 우암에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요청했다. “세 가지 이름이 다 아름답다. 그러나 모든 물건은 반드시 모여서 하나로 되게 마련이니, 셋을 합쳐서 태고정(太古亭)이라 부르는 것이 어떨까. 대개 현령의 정사는 소박하고 순후하여 시속 관리의 버릇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안찰사(按察使) 민유중(閔維重)이 관리들의 성적을 고찰하면[考績] ‘온 경내(境內)가 태고(太古) 때와 같다’고 하였으니, 이 사실은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미 전한다면 이 정자에 게시해서 후일 이 정자에 오르는 이가 보고 감모(感慕)하는 바가 있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기문에 현령의 인품을 이렇게 기록했다. “현령은 세가(世家) 출신으로 깊은 산속에 숨어 살았는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숨어 살면서 본래의 뜻을 지켰다고 조정에 추천하여 효종(孝宗) 때에 아름다움을 칭찬(稱讚)하고 장려(奬勵)하며 선발[奬拔]되었으나 기뻐하는 기색도 없고 높은 관직을 구하지도 않아 그 거취가 솔직하였고 남의 나무람과 기림에 관심이 없었다. 이 고을에 와서는 날마다 산골 백성들과 더불어 농사를 말했고 형벌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가끔 포의 갈건(布衣葛巾)으로 위로는 산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샘물 소리를 들으면서 초연(超然)히 주묵(朱墨 붉은 먹과 검은 먹인데 관리의 장부를 말함) 따위에 얽매임이 없었으니 이은(吏隱)의 의취가 여기에 있다. 가끔 창문에 기대어 유연(悠然)히 시속을 벗어날 생각으로 오르고 내리고 얻고 잃는 데 관심이 없었으니 와선(臥仙)의 흥취(興趣)가 적지 않았다. 바위로 된 산봉우리가 빼어나고 운연(雲烟)이 걷혔다 끼었다 하는 곳에 홀로 서서 조석으로 관망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주홀(拄笏)의 뜻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그 사람이 그 고을 백성에게 매우 적합하니 그 도(道)의 안찰사가 태고(太古)로 고적(考績)하였음이 당연하다. 이는 모두 실제의 일이다. 실제로써 그 실제와 바꿨으니, 이는 바꾸지 않음으로써 바꾼 셈이다. 어찌 실제와 어긋나거나 과시하는 데 가깝다 하겠는가.”

기문 말미에 “편액(扁額)과 계학(溪壑) 등 여덟 글자는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필적이다. 병오년 현종 7년(1666) 9월에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창계(滄溪) 임영(林泳)은 “누가 이 정자에서 취하는 데 인색할 쏜가[誰向玆亭一醉慳] 흥이 올라 자리 옮기며 감도는 물굽이 굽어보네[興來移席俯回灣] 무성한 풀은 깨끗한 모래톱 가운데 가득하고[萋萋草滿明沙際] 정겨운 새는 어지러운 나무 사이에서 지저귀네[款款禽啼亂樹間] 솔 빛은 고요하게 이끼 색과 어울려 예스럽고[松色靜連苔色古] 관리는 평온하게 촌사람 대하며 한가롭네[官人穩對野人閑] 중류에 떠 내려오는 복사꽃 잎 문득 바라보니[中流忽見桃花片] 무릉도원 찾아가는 나루 물어 돌아오고 싶지 않네[欲問仙津未擬還]”라고 노래했다.

구전(舊傳)에 따르면 용담향교는 고려 초 동향면(銅鄕面) 능금리(能金里) 지금의 향교 부근 후록(後麓)에 창건되었다. 공양왕(恭讓王) 때 縣令 崔自卑가 옥거리(玉渠里)에 중건(重建), 조선 선조 때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병화(兵火)로 오성(五聖)의 위패를 주천면 운봉리 동굴(洞窟)로 이안(移安), 이듬해 동편으로 재건(再建), 인조11년(1633)에 중건, 용담댐 건설로 1988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移建)했다.

용담면 수천리 망향의 동산 태고정 인근에 옮긴 수많은 비석 중 흰대리석으로 만든 삼천서원묘정비(三川書院廟庭碑)가 눈에 돋보인다. 비문에 “전라도 용담현에는 삼천서원이 있어 안자(顔子: 顔回) 양정자(兩程子: 程顥, 程頤) 주자(朱子: 朱熹) 제갈무후(諸葛武侯: 諸葛亮)을 봉사하고 있다. 고을 북쪽에 안자동이 있고, 서쪽에는 주자천이 있고, 그 중앙에 와룡암(臥龍巖)이 있고, 남쪽에 정자천이 있다. 당초 명명한 내력은 지금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산천암동(山川巖洞)이 옛 현인의 이름과 칭호로 붙였으니 참으로 기이하고 광명을 입은 바가 크니 향사지내는 일 또한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라고 적혀 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