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45藏春亭, 하늘이 품부(稟賦)한 이치를 알아 돌이켜 찾는다면 감출 수 없던 봄이 나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네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多侍面) 죽산리(竹山里)에 위치한 장춘정(藏春亭)은 장춘(藏春) 류충정(柳忠貞)이 지은 유실형(有室形) 정자이다. 장춘은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있을 당시 야인(野人)을 물리쳐 북관(北關)을 편안하게 했으나 국정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했다. 장춘의 외조부인 이종인(李宗仁)도 인근에 와서 소요정(消遙亭)을 지었는데, 많은 명사들의 왕래가 잦았다.
나주(羅州)는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통의(通義)라고도 했으며, 신라 때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錦城)이라 했다.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할 때 후백제(後百濟)를 병합하는데 나주 사람들의 힘이 컸다 하여 남방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 삼았다. 고려 성종2년에 나주목(羅州牧)을 두어 지방관이 파견되었고, 성종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진해군(鎭海軍)이라 불러 해양도(海陽道)에 예속시켰다. 현종 9년에 목(牧)으로 승격시켜 조선조까지 지속되었다.
고을의 별칭으로 발라(發羅), 통의(通義), 금산(錦山), 금성(錦城)이라 불렀다. 고을 동쪽으로 화순(和順), 남쪽으로 영암(靈巖), 서쪽으로 무안(務安) 과 함평(咸平), 북쪽으로 광주(光州)와 인접해 있다. 고을 북쪽에 위치한 금성산(錦城山)은 나주의 진산(鎭山)으로 단중(端重)하고 기위(奇偉)함으로 이름났다. 능주(綾州)와 남평(南平)을 지나는 지석강(砥石江)을 드들강이라고 하여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지석강이 광주를 지나는 황룡강(黃龍江)과 극락강(極樂江)과 합류하여 영산강을 이루어 서해로 흘러간다.
나주의 풍속은 순박하여 다른 생각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는 것을 업(業)으로 삼았다. 나주향교(羅州鄕校) 서남쪽 40여리 다시면(多侍面) 죽산리(竹山里)에 이름난 정자가 있으니 장춘정(藏春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장춘정(藏春亭)은 죽포(竹浦) 서쪽에 있다”라고 했다. 장춘(藏春) 류충정(柳忠貞)이 낙향하여 정자를 지었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장춘정기(藏春亭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前) 훈련원(訓鍊院) 첨정(僉正) 류군(柳君) 중한(仲翰)이 죽포(竹浦)의 굽이에 정자를 세웠는데, 돌을 베개로 삼고 맑은 물을 굽어본다. 높은 바위가 좌우에 늘어서 있고 무성한 숲이 비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아름다운 화목(花木)들을 나란히 심어 놓고는 그 현판에 써 붙이기를 ‘장춘정(藏春亭)’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정자의 서쪽 노는 땅을 개척한 뒤 작은 집을 짓고 ‘매귤(梅橘)’이라 써 붙였는데, 모두 난간을 세우고 단청(丹靑)을 입혀서 영롱하고 완연하며 아늑하고 상쾌하여 별천지(別天地)와 같다.”
기문에 고봉은 “1년의 봄은 3개월에 그칠 뿐인데 지금 ‘봄을 감추어 보관하였다[藏春]’라 했으니 여기에 대한 설명이 있겠는가?”라고 하자 장춘은 이렇게 답했다. “4시(時)와 8절(節), 24기(氣)와 72후(候)가 1년 가운데 돌고 있으며 육합(六合) 밖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다 측량하지 못한다. 다만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기억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동풍이 불어 얼음이 풀리면 숨어 있던 벌레들이 비로소 나오는데, 소양(小陽)의 기운이 모두 지상(地上)에 통달한다. 그리하여 복사꽃이 비로소 피고 꾀꼬리가 욺에 이르면, 천지의 원기(元氣)가 가득하고 온갖 꽃들이 꽃봉오리를 드러낸다. 아름다운 숲은 땅에 덮여 있고 꽃들이 울긋불긋 곱게 피니, 산은 마치 단장하여 화려한 듯하고, 물은 마치 담박하여 멀리 있는 듯이 보인다. 한낮의 햇빛은 더욱더 눈부시고 푸른 하늘은 더욱 넓으니, 이것은 바로 봄 한때의 좋은 기회로, 옛사람들이 시름을 잊고 감상했던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맹꽁이가 한 번 울어 축융(祝融: 火神으로 南方과 여름철을 맡음)이 때를 다스리게 되면 지난번 봄이었던 것이 바뀌어 여름이 된다. 그러하니 봄은 진실로 감추어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유독 이 정자만은 그렇지 않다. 기이한 화목(花木)이 무려 수십 종(種)이 모여 있는데, 종류마다 각기 수십 그루가 된다. 그리하여 뿌리가 서려 있고 잎이 맞닿아 있으며, 가지가 어우러져 있어서 붉은 꽃이 지면 흰 꽃이 남아 있고, 청백색의 꽃이 드리워 있는가 하면 노란 꽃이 피어 있으니, 비록 시절이 바뀌어도 꽃이 피는 것은 쇠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겨울에도 푸르른 나무가 있어서 처마 가에 푸름을 나타내고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있으며, 왕왕 외로운 향기를 풍기는 차가운 꽃이 햇볕에 예쁘게 피어 봄기운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내 정자에 들어오는 자들은 항상 봄의 기운이 이 사이에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정자를 ‘장춘정(藏春亭)’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고봉은 “내 들으니 회암(晦庵: 朱子) 선생이 일찍이 인성(人性)의 사덕(四德)을 논하면서 하늘의 사시(四時)를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그 말씀에 이르기를 ‘봄에는 봄기운이 생기고 여름엔 봄기운이 자라고 가을엔 봄기운이 성숙하고 겨울엔 봄기운을 간직해 둔다.’ 하였으니, 하늘의 성정(性情)은 비록 원(元) 형(亨) 리(利) 정(貞)에 따라 낳고 자라고 거두고 감추는 등의 각기 다른 명칭이 있으나, 봄이 만물을 낳는 기운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사람의 성정은 비록 인(仁) 의(義) 예(禮) 지(智)에 따라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각기 다른 명칭이 있으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관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사람이 만일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진리를 알아 돌이켜 찾는다면 감춰 둘 수 없던 봄이 진실로 나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는 것이니, 이에 살펴보아서 그 마음을 다한다면 또한 가능하겠는가? 가능하지 않겠는가?”라며 기문을 갈음했다.
고봉은 장춘의 시에 차운(次韻)했다. “조그마한 정자 깨끗하게 절벽에 열렸으니[小堂淸絶鑿崖開] 귤나무의 푸른 빛 술잔에 비치네[橘樹蒼蒼映酒盃] 연하(煙霞)를 토하는 산은 천고의 빛이요[山吐烟霞千古色] 풍월을 흔드는 강은 어김없이 찾아오네[江搖風月一時來] 봄 창가에 외로운 노랫소리 새들이 화답하고[春牕孤嘯鳥相和] 얇은 도롱이 입은 저녁 배 물고기도 의심 않네[晩艇輕簑魚不猜] 우습구나! 동쪽 이웃 게으른 사람이[自笑東隣踈懶客] 모자 쓰고 흥을 즐겨 몇 차례나 배회하네[幅巾耽興幾徘徊]”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은 “서쪽 호수가에 멋진 절승지 있어[西湖勝絶地] 꽃나무 속에 한 정자 물드네[花木一軒染] 만약 배를 타고 이 곳 구경 못한다면[若未乘再訪] 나비되어 꼭 찾아오리라[何妨化蝶尋]”라고 노래했다.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은 “위태로운 벼랑을 다 쪼개 명승구역으로 만들어[斷盡危崖作勝區] 난간 기대어 날마다 지나는 배를 전송하네[憑欄日日送行舟] 섣달을 지나면 백설인지 매화인지 향기가 헷갈리는데[香迷白雪梅經臘] 가을이 되면 귤은 황금빛을 빼앗네[色奪黃金橘有秋] 천하에 이 같은 같은 품격이 다시 없으니[天下更無同品格] 사람은 마땅히 풍류를 차지해야 하네[人間宜得擅風流] 한 누정에서 서로 마주하여 술동이를 여는 곳에[一堂相對開樽處] 모름지기 창랑의 옛 낚시 동아리를 기억해야 한다네[須記滄浪舊釣儔]”라고 장춘을 생각하며 읊었다.
사암(思菴) 박순(朴淳)은 이곳을 찾아 장춘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읊었다. “대나무 어둑한 붉은 비탈에 좁은 길 열려 있어[竹暗丹崖一逕開] 가을바람에 닻줄을 매어두고 누각을 찾아왔네[秋風繫纜訪樓臺] 주인은 지금 남쪽 변경 군사를 관리하러 갔고[主人今管南邊戍] 내 가고 나면 주인 돌아와 아마도 손수 심은 매화를 만져 보겠지[歸路應摩手植梅]”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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