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46籠山亭, 문창후(文昌侯)의 자취 풍월(風月)과 연하(煙霞) 홍류동(紅流洞)에 서려 있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홍류동(紅流洞) 계곡에 위치한 농산정(籠山亭)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이곳 가야산(伽倻山)으로 은둔했다고 전하고 있다. 정자의 건너편 계곡에 고운의 둔세시(遯世詩)가 알려진 시가 각석(刻石)되어 있고, 결구인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감싸게 하였네[故教流水盡籠山]’의 뜻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농산정의 창건 연대는 알수 없으나 1936년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중건하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의 차운시와 중건 당시 후학들의 차운시와 기문 등이 있다.
합천(陜川)은 신라의 대량주군(大良州郡)으로 대야(大耶)라고도 했고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강양군(江陽郡)이라 고쳤다. 고려 태조의 손자이며 대량원군(大良院君)이 왕위에 오르자 곧 현종(顯宗)이다. 모후인 효숙태후(孝肅太后)의 고향이라 하여 지합주사(知陜州事)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종 때 합천으로 고쳐 군(郡)으로 만들었다. 또한 고을 북쪽 30여리에 속현(屬縣)인 야로현(冶爐縣)이 있으니 신라 때 적화현(赤火縣)으로 경덕왕 때 야로(冶爐)로 고쳐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삼가(三嘉)와 초계(草溪)를 합쳐 합천군(陜川郡)으로 명명하며 고을의 별칭으로 대량(大良), 강양(江陽), 합주(陜州), 대야(大耶)라 불렀다.
고을 동쪽은 창녕(昌寧), 남쪽은 의령(宜寧)과 산청(山淸), 서쪽은 거창(居昌), 북쪽은 경상북도 고령(高靈)과 성주(星州) 등과 인접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을의 풍속은 검소하고 소탈함을 숭상한다”고 하였고, 북쪽의 성산(星山: 星州)와 남쪽의 진산(晉山: 晉州)와 닿아 여러 산이 읍(揖)하듯 푸른 병풍처럼 둘렀다.
야로면 구정리에 합천향교(陜川鄕校), 삼가면 소오리에 삼가향교(三嘉鄕校), 초계면 초계리에 초계향교(草溪鄕校), 그리고 합천읍에 강양향교(江陽鄕校)가 있다. 합천향교 북서쪽 30여리 가야면 구원리 홍류동(紅流洞)에 이름난 정자가 있으니 농산정(籠山亭)이다. 동구(洞口)에 무릉교(武陵橋)가 있고, 다리를 건너서 계곡 위로 5여리를 가면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가 새겨진 돌이 있다. 고운집(孤雲集)에 “선생이 일찍이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에 은거하였는데, 지금도 치원촌(致遠村)이라는 곳이 있다. 후세 사람들이 공경하여 치인촌(治仁村)이라고 고쳐 불렀다”라고 했고, 성호전집(星湖全集) 해동악부(海東樂府)에 “고운이 벼슬을 버리고 방외에 노닐어[孤雲棄官遊方外] 지금까지 신선 자취가 가야산에 남아 있네[至今仙蹟留伽倻]”라 기록되어 있다.
고운은 “겹쳐진 돌 사이로 미친 듯 부딪치며 겹겹 산을 포효하니[狂噴疊石吼重巒] 지척에서도 사람의 말소리 분간하기 어렵네[人語難分咫尺間] 혹시라도 시비(是非)의 소리가 귀에 들릴세라[常恐是非聲到耳]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감싸게 하였네[故教流水盡籠山]”라고 읊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돌을 치원대(致遠臺)라고 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깎아지른 낭떠러지와 넓고 평평한 바위에 이름을 지어 깊이 파 놓은 그 글자의 획이 완연하다. 홍류동, 자필암(泚筆巖), 취적봉(吹篴峯), 광풍뢰(光風瀨), 제월담(霽月潭), 분옥폭(噴玉瀑), 완재암(宛在巖) 등은 모두 그가 이름 지은 것들인데, 세월이 오래 지났어도 마멸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 유람을 온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제공할 만하다. 또 고운이 지은 절구(絶句) 한 수가 폭포의 석면(石面)에 새겨져 있다. 매년 장마에 물이 넘쳐 광란하듯 씻겨 내려가는 바람에 온통 닳아 없어져서 지금은 다시 알아볼 수 없게 되었으나, 한동안 만져 보다가 겨우 희미하게나마 한두 글자를 분별할 수가 있었다.”
또한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가야산기(伽倻山記)에서 “해인사(海印寺)는 신라의 고찰로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보관하고 있다. 남쪽의 바위 절벽은 신라 최학사(崔學士: 孤雲)가 은거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천석(川石) 사이에 홍류동, 취적봉, 광풍뢰, 음풍대(吟風臺), 완재암, 분옥폭, 낙화담(落花潭), 첩석대(疊石臺), 회선암(會仙巖) 등이 있으며, 동구를 나서면 무릉교(武陵橋)와 칠성대(七星臺)가 있으니 모두 학사의 대자(大字)를 돌에 새겨 놓았다”라고 했다. 또한 옥소(玉所) 권섭(權燮)의 유가야기(遊伽倻記)에 “고운의 각석시(刻石詩)는 이미 마멸되고 다만 기구(起句) ‘狂奔’과 결구(結句) ‘故教’ 네 글자만 분별할 수 있는데, 우암(尤庵) 선생이 계곡 북쪽 바위 사이에 다시 그 시를 모사해 새겨놓았다”고 했다. 농산정 계곡 맞은편 바위에 고운의 시가 새겨져 있고, 우암서(尤庵書)라고 적혀 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맑은 시의 광염이 푸른 산을 쏘아 맞히고[淸詩光燄射蒼巒] 부서진 돌 사이에 먹물의 흔적만 남았구나[墨漬餘痕闕泐間] 세상에서는 다만 신선되어 갔다고 하는데[世上但云尸解去] 무덤이 빈 산에 있는 줄을 어찌 알리오[那知馬鬣在空山]”라고 고운의 시에 차운했다. 또한 愼齋(신재) 주세붕(周世鵬)은 “첩첩 산중 콸콸 맑은 샘물 솟아나는데[激激淸泉疊疊巒] 이곳은 신선의 세상이라 전해온다네[由來此地是仙間] 고운이 한번 떠난 길 어디인지 찾을 수 없어[孤雲一去無尋處] 다만 복숭아꽃 물에 떠 흘러간다네[只有浮花流出]”라고 차운했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환한 대낮 우렛소리 산봉우리 흔드니[雷霆白日動攢巒] 흐르는 물거품도 마침내 바다로 흐르네[流沫終歸碧海間] 차고 기우는 기미(機微)를 사람들은 모르고[盈縮一機人不識 다만 샘물이 공산에서 나온다고 의심하네[只疑泉脈發空山]”라는 시를 남겼다.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은 “비로전 옛 건물은 여러 산봉우리에 둘러싸였고[毗盧故殿擁群巒] 학사가 남긴 시는 수석 사이에 새겨 있네[學士遺題水石間] 신선의 자취 찾을 수 없음이 서글퍼라[怊悵仙蹤無覔處] 오래도록 떠 있는 밝은 달이 청산을 비추네[長留明月照靑山]”라며 해인사에서 차운하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은 “하늘이 가야산 만 첩의 봉우리를 만드니[天作伽倻萬疊巒] 길 가는 나그네 흐르는 시냇가에서 말을 멈추노라[行人立馬水聲間] 해가 지는데 외로운 구름은 어디로 돌아가는가[孤雲日落歸何處] 꽃은 흐르는 냇물에 가득하고 달은 산에 가득하네[花滿川流月滿山]”라고 고운의 시에 차운했다. 또한 매산은 고운의 시를 새긴 우암의 각자(刻字)를 보고 “고운의 시구(詩句) 이미 아름답고[孤雲詩已好] 남간(南澗: 尤庵)의 글씨 더욱 빼어나네[南澗筆尤奇] 두 아름다움이 모여 볼거리를 이루니[兩美湊成處] 가야산은 이 때문에 훌륭하구나[伽山重以之]”라고 노래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우리 선조 유적을 이 산에서 우러르니[吾家先蹟仰玆山] 흐르는 물은 구름처럼 몇 해나 지났는가[流水行雲歲幾還] 시비를 염려하는 진중한 글귀는[常恐是非珍重句] 완연히 마음에 새겨 없어지지 않았네[宛然心畫未曾刪]”라는 시를 남겼다.
농산정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영한(金寧漢)의 농산정기(籠山亭記)과 지군(知郡: 陜川郡守) 정진기(鄭璡基)에 농산정중수기(籠山亭重修記)에 의하면 “정자는 고운 선생이 은둔한 곳으로 고운이 신라 국운의 쇠함을 보고 가야산에 들어가 은둔했다. 선생이 남긴 시의 결구의 뜻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병자년(丙子年 1936년)에 문중과 유림들에 의해 중건되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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