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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공기 2575년 추기석전 D-26] 특집-석전 일무 원형 논란의 전말(顚末)

<span style="color: rgb(255, 0, 0);">“문헌자료에 근거하여 제대로 복원된 석전대제 일무를 세계인들에게 선보여야 한다”</span>

오흥녕
2024.08.12·30분 읽기·조회 114

 

일제강점기인 1936년 9월22일 봉행된 추계석전에서 일무단이 원형이 훼손된 팔일무를 추고 있다.

 


 

 

1958년 춘계석전에서 성대 약학대학 신입생들이 일무를 추고 명륜당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영숙씨가 주장하는 일무 동작은 근거로 삼은 문헌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석전 일무는 1980년에 재현이 완료되었다'는 공식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성균관과 함께해온 임학선 성대 명예교수의 일무 동작은 다양한 근거자료를 바탕으로 체계화됐다.

 


 

 

2023년 추기석전의 문무(文舞) 모습으로, 이같은 규모는 세계에서 서울 문묘 성균관에서만 볼 수 있다.

 


 

 

2023년 10월26일 유교문화축전 행사에서 일무단이 문무(文舞)의 동작을 선보이고 있다.

 


 

 

'팔일무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중국이 가장 배우려 하는 무무(武舞)의 모습이다.

 


 


 

 

무무(武舞)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석전 일무 원형 논란의 전말(顚末)

 

 

이상호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수석부회장, 유교신문사 대표

 


 

1. 들어가며

 

국가무형유산 제85호 석전대제의 일무(佾舞)는 민가가 아니라 국가에서 관리하던 춤으로 모든 절차가 나라의 법으로 정해졌고, 춤사위는 예법에 의거해 만든 것으로 문헌 기록에 남겨져 있음은 물론 개인이 임의로 바꿀 수 없다.

 

본지(제1119호(2024.7.15.) 3면 ‘조선시대 서울 문묘 성균관에서의 석전 봉행과 음복주, 음복례-석전 음복주를 만드는 쌀의 수량까지 국가가 정했다’)에서 보도한 바와 같이 석전은 국가의례로서 음복주 제조용 쌀의 수량까지 제도로 정할 정도로 엄격했으니 일무는 물론 다른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중국 고대로부터 이어진 일무는 주나라 시대에 이르러 줄을 지어서 추는 춤의 형식체계를 갖추게 된 이래 송나라를 거쳐 고려 예종 11년(1116)에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일무는 1116년에 송나라로부터 들여온 것에서 유래한다.

 

고려와 조선 왕조를 거치는 동안에도 일무의 위치, 춤사위의 진퇴법 등에 관한 문제는 끊임없이 논란이 됐고, 이에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태종, 세종, 정조는 하·은·주 삼대의 고악(古樂)에 준해 일무의 원형을 복원하고 전통의 맥을 지켜왔음이 『조선왕조실록』에서 거듭 확인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일무 춤사위를 담당하던 예악인들이 모두 흩어지며 대부분 망실(忘失)되어 올바른 전승이 어려워지게 됐다.

 

이후 지난 1980년 성경린 전 국립국악원장이 구술하고 김영숙이 정리했다고 하는 춤사위를 2006년 춘기석전까지 성균관 석전에서 추었지만 이 역시 원형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에 성균관에서는 한·중 문헌을 비교 연구하는 고증을 거쳐 2006년 문묘 일무의 춤사위를 원형으로 복원해 석전에서 실행하게 된다.

 

문묘 일무의 원형 복원은 성균관대 동아시아특성화사업단, 유교문화연구소의 지원과 (사)국가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보존회(이하 ‘석전대제보존회’), 석전교육원, 한국석전학회의 후원으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5차에 걸친 ‘문묘 일무 원형복원을 위한 학술시연’을 거쳐 2006년 9월 『춘관통고』와 『악률전서』에 근거해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춤사위를 복원했고, 석전학과 무용학 관계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공식심의를 거쳐 복원한 문묘 일무가 채택됐다.

 

이에 석전대제보존회는 2007년 8월 개선된 일무의 심의를 문화재청에 공식 요청하고, 별첨으로 21종의 심사첨부자료를 보냈으나 당시 문화재청은 ‘종전 일무와 개선된 일무가 대립되고 있는 바이므로 일무의 원형 관련 논란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종전대로 시행하라’고 통보하고, 이후 양측의 입장만 고수한 채 17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지난해(2023년) 추기석전을 앞두고 성균관은 ‘일무는 성균관대에서 연행하되 『반궁예악서(반궁예악전서)』를 기본으로 문화재 지정 당시의 일무를 연행키로 하고 성균관, 문화재청, 성균관대학교에서 각각 참관해 봉행 후 평가회를 개최한다’고 문화재청, 성균관대학교와 합의했다.

 

하지만 추기석전을 끝낸 후에도 평가회는 개최되지 않았고, 석연치 않은 이유로 올해(2024년) 춘기석전 때는 일무와 문묘제례악을 아예 연행(演行)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코로나19 유행 등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번 시행되던 일무와 문묘제례악이 이번 추기석전에서는 연행되는지에 대한 유림들의 관심도가 고조되는 가운데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일무 원형 논란이 다시 일어나자 문화재청에서 명칭을 바꾼 국가유산청은 ‘국가무형유산 지정 당시의 일무’라며 하나의 동영상을 보내 왔다.

 

그러나 연행 일자도 알 수 없고, 무보(舞譜)도 없이 일부분만 편집된 동영상이 지정 당시의 일무가 아니라는 점(지정 당시 근거문헌 『반궁예악서』의 동작과 다름)은 몇 가지 동작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국가유산청이 이같은 무리한 주장을 왜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동영상이라도 내놨으니 일무 원형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고, 이에 그동안 서울 문묘 성균관의 석전 일무를 두고 벌어졌던 논란의 전말을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1980년 성경린이 구술하고 김영숙이 복원했다’고 하는 일무는 원형 아닌 창작무

 

1) ‘석전 일무 원형’ 논란의 출발

 

‘석전 일무 원형’ 논란의 당사자인 김영숙은 자신이 복원하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76년부터 시작된 문묘제례 일무의 재현작업은 1980년 가을에 완성하여 그해 가을 국립국악고등학교 목멱예술제[국립극장 소극장, 현 달오름극장]에서 성경린 선생 외에 김기수 원장, 김성진 악사장, 김천홍 선생, 김태섭 선생 등 국악계의 원로들이 함께 자리한 가운데 재현된 문묘제례 일무를 시연하고 품평하여 완성하였으며 다음 해인 1981년부터 춘기석전대제에서 국립국악고등학교 학생들에 의해 추어지게 되었다”(김영숙, 「문묘제례 일무의 전승과 재현」, 64-65쪽, 2007)

 

그리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학교 4학년 말 국립국악원 무용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76년대 초까지 국립국악원에서 근무하다가 이후 국립국악고에서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국악고 재직 당시 종묘대제의 팔일무와 봄‧가을 성균관에서 열리는 석전 문묘제례 일무 지도를 맡았다. 이것이 계기가 돼 1982년에 이화여대에서 ‘현행일무고(現行佾舞考)’라는 일무와 관련된 논문을 집필한 바 있다”(『아시아뉴스통신』 2017년 6월6일 기사 ‘전통예술계의 대모 정재연구회 김영숙 예술감독’)

 

이에 따르면 대학을 갓 졸업한 무용단원이 ‘석전 일무 원형’을 복원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석전 일무 원형’에 대한 논란은 1980년 김영숙이 복원했다는 일무에 대한 이같은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에서 출발한다.

 

2) 1980년 김영숙의 일무는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144호에도 맞지 않음

 

국가유산청은 성균관에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의 내용대로 석전을 봉행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그렇다고 국가유산청이 말하는 원형이 뭔지 분명하게 밝히지도 않고, 무보와 같은 근거 자료도 제시된 적이 없다.

 

국가유산청의 주장대로라면 문화재 지정 당시의 일무는 1981년의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제144호’와 1981년 국립국악원에서 발간한 『국악전집』 제9집에 실린 일무보, 19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에 부록으로 실린 문묘일무보라고 봐야 한다.

 

이 세 가지 무보의 공통점은 모두 삼방배(三方拜)를 지양(止揚,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김영숙은 “문묘제례 일무를 재현함에 있어서 참고한 『반궁예악서』의 무보와 우리나라 제도의 차이점을 <표1>을 통해 일차 비교한 후 문헌을 바탕으로 한 우리나라 일무의 고유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며 아래의 표를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김영숙, 한국 문묘제례일무의 고유성과 이에 따른 재연 및 전승, 『한국무용기록학회』14권, 2008, 74~75쪽)

 

표1. 현행 문묘제례 일무와 『반궁예악서』 무보와의 차이점

 

 

 

현행 문묘제례 일무

 

『반궁예악서』 무보

 

시대 배경

 

송·원대

 

명·청대

 

공자 존호

 

대성지성문선왕

 

지성선사

 

일무 제도

 

팔일무(64명)

 

육일무(36명)

 

일무 내용

 

문무와 무무

 

문무

 

의물

 

문무에는 약적을 들고,

 

무무에는 간척을 든다.

 

적의 깃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약적을 든다.

 

적의 깃이 위로 솟아 있다.

 

행례와 일무

 

영신·전폐·초헌에 문무를 추고,

 

아·종헌에 무무를 춘다.

 

초헌·아헌·종헌에

 

문무를 춘다.

 

무위

 

정로의 서쪽에 선다.

 

정로를 중심으로 좌우(동서)

 

3열씩 나뉘어 선다.

 

준비 동작

 

가슴에 ⅠⅠ자로 모은다.

 

약을 안으로 하고 적을 바깥으로 한다.

 

약적

 

문무는 양을 상징하며, 왼손에

 

들은 약은 양의 기운이 강한

 

것을 취하며, 약은 세워 들거나

 

양손을 모을 때는 약을 앞으로

 

모은다. 오른손에 들은 적은 음을

 

상징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약은 땅을 상징하여 수평으로 들고,

 

적은 하늘을 상징하여 종으로 든다.

 

(약은 땅을 상징하므로 음을 나타내고, 적은 하늘을 상징하므로 양을 나타낸다)

 

간척

 

무무는 음을 상징하며, 오른손에

 

들은 척을 강조하여 척으로

 

간을 내려치는 동작을 한다.

 

양손을 모을 때는 간을 횡(橫)

 

으로 하고 척을 종(縱)으로 한다.

 

 

 

춤사위

 

팔풍을 상징하여 팔방으로 움직인다.

 

어깨 높이 위로 올리지 않는다.

 

삼진삼퇴

 

제자리에서 춘다.

 

삼진삼퇴(三進三退)한다.

 

악곡

 

주례의 음양합성에 따라

 

등가의 연주에는 문무를 추고,

 

헌가의 연주에는 무무를 춘다.

 

(응안지곡·명안지곡·성안지곡 등)

 

등가·헌가가 없이 하나의

 

월대 위에서 연주한다.

 

명 세종 가정 때에 악곡이

 

바뀌었다.

 

(영화지곡, 안화지곡, 경화지곡 등)

 

악장

 

전폐에 ‘自生民來’, 초헌에

 

‘大哉聖王’, 아·종헌에

 

‘百王宗師’를 부른다

 

초헌에 ‘自生民來’, 아헌에

 

‘大哉聖師’, 종헌에

 

‘百王宗師’를 부른다.

 

재현

 

한국적 제도에 따른 한국화된

 

춤사위로 재현한 것으로 우리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전승할 수 있다.

 

대만·중국이 일무를 재현할

 

때 근거가 된 명대 문헌의

 

무보를 충실하게 재현하여

 

또 하나의 동북공정이 될 수 있다.

 

전승

 

장악원→이왕직아악부·아악부원

 

양성소→국립국악원·국립국악고교로 이어져 왕가의 법통으로 계승.

 

명대 문헌을 바탕으로 연구

 

발표한 실적물로서

 

전승계보가 없음.

 

인증

 

국립국악원, 국립국악고등학교

 

등 악무관련 기관의 인증을

 

거침. 성균관에서 추인,

 

국가유산청에서 중요무형유산으로 인정.

 

석전대제보존회의 요청으로

 

한국석전학회의 심사를 거쳐

 

성균관에서 인증.

 


 

이 표에서 ‘현행 문묘제례 일무’란 김영숙 자신이 만든 것인데, 엉뚱하게도 자신이 만든 일무가 『반궁예악서』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는 자신에게 구술해 줬다는 성경린의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제144호의 내용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김영숙은 자신의 주장과 관련해 어떤 전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는데, 예를 들어 자신이 복원한 일무의 배경이 송·원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선언에 불과할 뿐으로 어떤 전거도 표시하지 않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김영숙의 의도와 달리 주장 모두가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제144호와 배치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3)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제144호의 일무 관련 핵심 내용은 ‘삼방배’ 지양과 ‘반궁예악서’ 빙거(憑據)

 

석전대제는 1986년 11월1일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됐다. 이에 앞서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열린 문화재위원회는 1986년 10월8일 문화재관리국 회의실에서 성경린, 예용해, 유희경, 이두현, 정병호 등 5명의 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는데, 석전대제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함과 동시 보유단체를 인정할 지의 여부를 의결하는 회의였다.

 

이때 제안사항과 제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〇 제안사항 : 석전대제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그 보유단체를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자 부의하오니 심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〇 제안사유 : 석전대제는 신라 이래 고려 조선조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정중한 예속으로 그 전통음악인 문묘악과 팔일무 및 고전적인 의식절차가 화려하고 장중하여 예술적 가치가 크므로 이를 중묘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 보존하고자 함.

 

〇 보유단체 인정 :

 

·보유단체 명칭 : 중요무형문화재 석전대제보존회

 

·소재지 : 서울 종로구 명륜동 3가 53

 

·대표자 : 박중훈(남, 71세, 성균관장)

 

·보유자 신청대상자 : 박중훈(남, 71세), 최성환(남, 42세)

 

·지정조사자 : 성경린(문화재위원), 유승국(전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참고사항 : 조사보고서 별첨

 

이 회의에서는 원안대로 의결하되 보유자 인정은 하지 않기로 했고, 이때 별첨된 조사보고서가 무형문화재 지정보고서 제144호인데 지정조사자인 성경린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四. 其他(81年 秋祭 參觀) <중략> 8.15 이전까지 석전행례에 여자는 전무하였는데 제관에 여집사가 등장하고 일무판에 남자의 문무, 무무이던 8일무가 현재는 국악고등학교 여학생으로 대체된 것들이 석일과는 크게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일무의 내용은 종래 안이하고 간략하던 춤사위를 지양하고 ‘반궁예악서’에 빙거하여 문묘일무의 옛 모습을 돌이킨 것은 가위 획일적인 개선이오 장거라고 이를 것이다. 다만 춘추 석전에 성균관에 보관되고 있는 악기와 의상으로는 부족해서 국립국악원에서 그 부족분을 매양 보충하여 주악에 당하고 있는데 이의 보완 제작도 바삐 서둘러야 할 것으로 보았다. 1981. 9. 23’

 

여기서 ‘석전 일무 원형’ 문제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일무의 내용은 종래 안이하고 간략하던 춤사위를 지양했다’는 부분과 ‘반궁예악서에 빙거하여 문묘일무의 옛 모습을 돌이킨 것은 가위 획일적인 개선이오 장거라고 이를 것이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보다 앞서 성경린은 1972년 5월25일자 「유림월보」에 기고한 ‘일무금석(佾舞今昔)’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본지 제1120호(2024.8.1.) 3면에 원문과 현대어로 풀이한 내용 수록)

 

‘내가 佾舞版에 처음 들어선 五十年前에도 文舞는 左方 中央 右方 中央 規則的인 三方拜로 始終이오 武舞는 亞獻은 선 자리에서 그리고 終獻은 廻身으로 도끼로 방패(干)을 소리내어 치는 춤사위로 固定되어 있었다. 확실히 原形 古形은 아닌 매우 單調롭고 雅拙한 佾舞로 轉落하였다는 印象이다. 종묘의 佾舞는 종묘제예악의 창제와 더불어 너무 어울리는 文舞 武舞가 새로 안무되고 그 舞譜가 「時用舞譜」(單一本國立國樂院所藏)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아악 佾舞의 정확한 舞容에 대해서는 전혀 막막하다. <중략> 佾舞의 舞容을 바로잡는 일 이것을 더는 미루지 말고 바삐 서둘러야 하겠다. 전날의 文廟의 석전이든 宗廟의 祭享에는 雅樂部의 定職 雅樂手만으론 不足되어 雅樂生과 外部에서 임시로 무원을 고용하여 세우고 있었다. 그러니 自然 제대로의 춤을 익히고 춘달 수가 없다. 그래서 窮餘之策으로 그런 三方拜와 干戚을 뚝딱거리는 簡易한 舞作이 案出된 게 아닌가. 이것은 정말 하루 速히 止揚되어야 할 것이다’

 

이로 보면 지정보고서에서 ‘종래 안이하고 간략하던 춤사위를 지양했다’는 것은 ‘삼방배’를 지양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지정조사보고서의 기준은 두 가지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삼방배’를 지양하고, 둘째는 『반궁예악서』를 빙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의 <표1>을 보면 김영숙은 일제의 잔재인 삼방배가 우리나라 고유의 일무라고 주장하는 한편, 자신이 만든 일무는 『반궁예악서』와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형문화재 지정보고서 제144호’에 맞지 않는 김영숙의 ‘석전 일무’는 석전에서 춰서는 안 된다.

 

3. 중요무형문화재 원형보존과 재창조 가이드라인

 

국가유산청은 지난 2006년 11월 「중요무형문화재 원형보존과 재창조 가이드라인」(이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성균관이 한·중 문헌을 비교 연구하는 고증을 거쳐 문묘 일무의 춤사위를 원형으로 복원해 석전에서 실행한 때와 같은 해이다.

 

가이드라인은 ‘중요무형문화재에 있어 원형’, ‘중요무형문화재 예능종목 음악분야 원형기준과 재창조’, ‘무형문화재 춤의 원형과 보존계승 방안’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국가유산청은 이 가이드라인에서 원형의 정의와 기준 등을 제시하고 있어 원형 논란의 해결에 여전히 유의미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가이드라인에서는 문화재보호법 그 어디에도 무형문화재의 원형 개념에 대한 설명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정재의 경우 원형의 개념은 보다 특수하게 적용되어야 하고, ‘본디 모습’으로서의 원형 전승에 보다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새로운 원형의 기준이 필요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1쪽)

 

‘무형문화재를 관리하는 공무원은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의 조사보고서를 기준으로 원형보호를 말하고 있다. 원형 훼손의 문제가 생기면 지정당시의 보고서를 통해 시정을 권고하기도 한다. 첫 지정 당시 당해 문화재가 원형을 갖춘 것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원형의 기준이 된다는 논리이다. <중략> 이러한 논리는 문화재위원들의 의견이 결합하여 무형문화재 정책의 기본근간이 되는 원형보존의 기본적인 논리로 오랫동안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 변화를 인정하는 무형문화재라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서 새로운 원형의 기준이 필요하다’

 

한편, 가이드라인에서는 당시 원형 논란이 제기된 ‘종묘제례 일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82쪽)

 

‘현행 일무는 재현 당시 김기수 선생이 「시용무보」를 중심으로 복원한 것이다. 오늘날 일무의 원형 훼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쪽에서도 이 문제는 잘 알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원형문제는 무형문화재 모든 지정 종목이 일무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지정 종목은 지정 당시의 것을 원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무형문화재의 원형문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일부 연구자들이 연구한 단편적인 몇 개의 논문을 바탕으로 원형의 시점과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지고 학계와 관련분야 전문가들에 의해 검증이 되어 인정될 때 그 시점에 이르러 종묘일무의 전승주체인 종묘제례악보존회에서 이를 참작하여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하고 있는 기준은 여러 면에서 타당하다. 그렇다면 국가유산청은 이 같은 가이드라인을 일관성 있게 지켜야 하고, 이는 ‘석전 일무 원형 논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석전 일무 원형’에 관한 연구는 오랫동안 여러 부문에서 심층적으로 이루어졌고, ‘석전 일무’의 전승주체인 석전대제보존회가 그 같은 연구 결과들을 참작해 수용하면 된다.

 

‘석전대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1986년 보유단체로 성균관의 ‘석전대제보존회’가 지정됐다. 이 석전대제보존회는 2008년 ‘사단법인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 석전대제보존회’로 법인화됐고, 지난해(2023년)에는 지침에 따라 ‘사단법인 국가무형문화재 석전대제보존회’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올해 또다시 문화재청의 국가유산청으로의 변화에 따라 ‘사단법인 국가무형유산 석전대제보존회’로 개명할 것인데 가장 앞장서서 법률과 규정을 준수해야할 국가유산청이 자신들이 정한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전승 주체를 무시하고 있다.

 

4. 2007년 개선 일무

 

석전대제보존회는 2007년 8월 3일 개선된 일무의 심의를 문화재청에 공식 요청하고, 별첨으로 21종의 심사 첨부자료를 보냈으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에 대해 전혀 답변하지 않고 있다.

 

반면 한국석전학회에서는 2007년 문묘일무 개선안에 대한 심사결과 최종종합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여기서는 1980년 김영숙의 일무와 임학선의 일무를 검토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〇 임학선은 1980년에 음악인 성경린이 『반궁예악전서(頖宮禮樂全書)』를 참고로 구술하고 김영숙의 지도하에 원형을 복원하였다는 기존 일무가 상당한 오류가 있어 대폭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심사위원 전원은 『반궁예악전서』에 대한 일무 술어가 청구자와 국립국악원 발행 『국악전집』 제9호의 해석은 원문과 서로 일치하나 김영숙의 해석만이 원문과 상당 부분 오역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한편으로 김영숙은 스승과 함께 참고했다는 『반궁예악전서』조차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논리적 일관성과 학문적 진지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김영숙의 논문 「문묘제례일무」(『釋奠學論叢』, 2005) 등에서조차 석전 일무에 관한 참고도서는 한 권도 없었다.

 

〇 기존 일무 복원당사자인 김영숙에 의하면 ‘일무는 몸과 몸으로 전승되는 것’이므로 문헌보다 스승인 성경린의 구술을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스승이 ‘복원에 빙거했다’(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144호)고 하며 건네준 『반궁예악전서』조차 원형복원과 관련한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등 송·명·청대의 모든 석전 일무에 관한 문헌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우를 범하였다. 그것은 학문적 자세에 어긋나는 독단에 불과할 것이다. 석전 일무는 '몸과 몸'으로 전승되는 창작무용이나 민속무용이 아니고, 오랜 세월 ‘제도’로 전해지는 춤이므로 춤 속에서 성현을 높이는 유교사상과 철학적 의미가 명확히 담겨야 한다. 또한 오랜 고전적 전통을 지닌 석전 일무는 현대에 와서 감히 임의로 창작·변형시킬 수 없는 춤이며, 무용전문가도 아닌 음악인 성경린의 창작을 절대시한다면 이 또한 학자의 연구 태도도 아닐 것이다.

 

〇 임학선은 원형복원을 위한 문헌적 근거로 『송사(宋史)』에 수록된 송대 신종 원풍2년(1079)의 일무술어와 철종 원우4년(1089) 섭방(葉防)의 무보의 술어, 그리고 명대의『궐리지』·『남옹지』·『악률전서』와 청대의 『반궁예악전서』, 조선 정조 때의 『춘관통고』(1788) 등 18종에 이르는 많은 관련 서적을 통해 조사·연구·검토한 결과를 상세히 소개하였고, 심사위원들은 석전 일무가 송대로부터 명·청대 그리고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팔일무나 육일무와 관계없이) 모두 일관된 형태로 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김영숙이 주장하는 일무단의 위치와도 무관함을 알 수 있었다.

 

〇 우리나라 석전 악무는 고려 예종 때(1116년) 송대 휘종으로부터 유입되었으나 당시의 문·무보는 1089년 송대 섭방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 연대 차이가 불과 27년 정도이고 춤사위에 담긴 ‘핵심내용(揖·辭·謙/공격·방어)’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섭방의 일무 술어에는 문무(文舞)를 ‘화성천하지무(和成天下之舞)’로, 무무(武舞)를 ‘위가사해지무(威加四海之舞)’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훗날 출간된 명·청대의 『궐리지』 『악률전서』 『반궁예악전서』와 조선의 『춘관통고』 등 대부분의 무보는 섭방의 일무술어와 일맥상통하여 그 형태가 거의 일치되고 있다. 그러나 김영숙은 화성천하지무와 위가사해지무가 각각 문무와 무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 이는 무보의 원전들을 전혀 검증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무무의 경우는 고증된 문헌조차 왜곡하여 문무를 바탕으로 하여 무무를 임의 창작하는 등 결국 무무가 가지는 특징을 살리지 못한 채 임의창작 되었다는 임학선의 주장은 이유 있다 할 것이다.

 

〇 80년 복원 당사자인 김영숙은 명대 이후의 무보는 송대 석전(제후의 례)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우리나라(천자의 예우)와 다르기 때문에 명·청대의 서적을 복원자료로 삼는 것이 우리 춤과 맞지 않다고 하였는데, 문헌적 탐구가 없었음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무는 천자의 예우나 제후의 예나 그 춤의 형식과 동작이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임학선은 이미 송대 무보(섭방)의 술어를 찾아내어 명대의 『궐리지』 『남옹지』 『악률전서』, 청대의 『반궁예악전서』, 조선의 『춘관통고』의 무보가 춤의 형식과 내용이 일관된 형태로 유지됨을 발견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임학선이 『악률전서』를 통하여 이제까지 숨겨졌던 무무보(武舞譜)를 최초로 발견해 무무의 원형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성균관 석전문화의 쾌거라고 할 수 있다.

 

〇 김영숙은 우리나라 석전이 송대를 기준으로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80년 복원 당시의 청대 자료인 『반궁예악전서』를 참고하였는데, 이는 자가당착이다. 왜냐하면 김영숙은 우리의 춤과 주체성을 강조하면서도 중국 송대를 기준하는 한편 80년 복원 당시 성경린과 함께 중국 청대 자료를 참고하였기 때문이다. 석전의례 자체가 이미 중국문화임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 바 어디까지 주체이고, 어디까지 객체인지를 명백히 가릴 수 있어야 한다. 고래로 석전 일무의 춤사위는 중국에서 넘어올 때 이미 개별동작의 명칭과 형태가 술어로 풀이되어 있어 임의창작은 있을 수 없다.

 

〇 김영숙은 중국과 달리 조선이 독자적으로 석전의례를 유지해야 함을 인정하면서도 조선 정조 때 발간된 『춘관통고』는 유독 중국 청대의 시기에 맞추어 주체성 없는 문헌으로 매도하고 있는 바 이는 오직 음악가 성경린과 김영숙만이 춤사위 창작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다른 조선 학자들은 모두 주체성이 없다는 주장은 독단에 불과하다. 『춘관통고』 속에는 송대는 물론 송대 이전의 일무 변화를 설명하고 있는 바 김영숙의 이러한 주장은 문헌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오히려 김영숙이 『석전학논총』에서 소개한 삼방배 형식의 일무야말로 어느 문헌에도 없는 오직 일제(日帝) 이왕직아악부의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국적 없는 창작무라 할 것이다.

 

 

〇 이상과 같은 이유로 임학선의 문묘일무 개선안은 종래의 일무보다 원형복원을 위함에 있어 상당한 접근을 이루었으며, 한편 일제 강점기가 남긴 정신적 잔재를 청산하는 의미도 있다고 판단된다. 문묘 석전은 우리나라에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85호로 지정된 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채택되었고, 바야흐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을 통해 세계적 문화콘텐츠로 발돋움하고 있는바 문헌의 고증에 따른 객관성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뒷날의 가능성까지 열어놓고 석전의례의 원형이 완전하게 복원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됨을 심사위원 전원은 공감하였다.

 

5. 마무리하며

 

석전대제보존회는 문화재청과 석전대제 일무검증위원회를 구성해 2017년 12월20일, 2018년 2월2일과 13일 회의를 개최한 적이 있는데, 석전대제보존회가 2007년 8월 개선된 일무의 심의를 문화재청에 공식 요청하고 별첨으로 21종의 심사첨부자료를 보낸 지 11년만이었다.

 

세 차례의 검증위원회 회의에서 양측의 전문가들은 큰 시각의 차이를 보였지만 김영숙의 술어 해석 오류에 대해서는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김영숙의 술어 해석은 더 이상 그 정당성을 얻기 힘들게 된 것이다.

 

당시 검증위원회에서는 참석자들의 어이없는 발언으로 소란이 일기도 했다. 문화재청이 추천한 한 전문가는 “문묘제례는 유교의례가 아니었으며 궁중의례였다”고 발언했는데, 유림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얘기지만 실제 전문가라는 인사가 한 말이다.

 

이 인사는 「문묘제례 일무 검토의견서」에서도 “문묘제례 일무를 포함한 문묘제례(석전대제)는 본래 궁중제례의 하나였다. 유교의례가 아니었다. 일무는 궁중제례에 수반되는 궁중무용이다” “현재 석전대제보존회는 문묘제례를 유교의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문묘제례가 유교의례라면 문묘제례악과 일무가 포함되어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유교제사를 궁중의례라고 주장하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발언이다. 성균관과 전국 234개 향교에서 행하는 석전이 궁중의례라니? 그렇다면 유림들은 궁중관리인인가? 향교에서 궁중의례를 하나? 조선의 궁중예법이 유교식이라는 말은 가능해도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시는 유교제사를 궁중의례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참관인으로 참석했던 당시 무형문화재과장은 “지금이 어느 때인데 현대를 살아가면서 중국 것인 명·청 시대의 의식을 왜 고집하는가”라는 망언을 쏟아내 검증위원들의 지탄을 받고 회의가 중단되기도 했다.

 

유교 의례의 전거는 다수가 중국의 고전이다. 석전대제의 원형을 찾기 위해 근거를 찾다보면 당연히 조선의 예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예서들을 살피게 되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이런 노력을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중국 운운하며 격하하는 것은 유교를 조롱하는 행위다.

 

성균관과 석전대제보존회는 일무검증위원회를 마치고, 「석전대제 일무 검증위 보고서에 대한 성균관의 입장」을 발표하고 문화재청에 송부했다.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하여 석전대제의 원형이 일부 어그러졌다. 유림의 입장에서는 선성(先聖), 선현(先賢)들에게 큰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이에 성균관과 석전대제보존회는 잘못된 석전대제 의식을 원형에 맞추어 바로잡고 우리 민족의 대표적 문화로 세계인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문화로서 만세에 전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한다. 성균관과 석전대제보존회는 석전대제의 원형을 찾고 전승함으로써 국민의 문화 의식 향상 및 민족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지속적으로 석전대제 전형 연구위원회를 구성해 올바른 문화 계승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검증위원회가 열린 지도 벌써 6년이 넘게 지났는데, 여전히 국가유산청은 ‘지정 당시를 기준으로 연행하고 수정⸱보완은 장기적 연구를 통해 추진할 것이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후속조치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석전 일무 원형’ 논란에 대한 성균관의 입장은 ‘제대로 된 석전 일무 원형을 복원해야 한다’는 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유교 종단의 중앙기구인 성균관과 석전의 전승 주체인 석전대제보존회 및 유교 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성균관대가 새롭게 ‘석전대제 전형연구위원회’를 구성해 지난 20여 년간 축적된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석전 일무 원형’ 논란을 종결시키고, 유교 종주국인 중국조차 부러워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더욱 발전시켜 매년 증가하는 외국인 관광객과 한국의 멋을 찾아 다니는 후속세대 등 한국인들에게 보고, 듣고, 느끼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없는 것도 만들어서 활용하려는 것이 세계 문화강국들의 흐름인데, 있는 것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K-컬쳐, K-유교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